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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7일 목요일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사변적 실재론 - 입문글 Speculative Realism - a Primer

http://blog.daum.net/nanomat/997

사변적 실재론 - 입문글
Speculative Realism - a Primer

――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지금까지 근대 서양 철학최소한 1781년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순수 이성 비판"을 출판한 이래로은 존재론보다 인식론을 우위에 두는 경향이 있었다. 존재론은 존재의 본성에 관련된 것인데, 가장 기본적인 층위에서 무엇이 존재하는지 규정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식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세계를 알 수 있는 우리 능력의 근거와 한계를 면밀히 조사한다. 인식론이 존재론에 앞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어떠한지에 관한 주장을 제시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주장들에 대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그것들이 참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칸트는 당대의 철학이 그런 근거를 제공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관찰이나 경험적 증거에 매이지 않은 채 순수한 논리적 연역에 의해 형이상학적 필연을 발견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독단적이었거나, 아니면 경험적 사실과 주관적 체험에 의거하지만 이런 특수한 사실들과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서 일반화할 수 없다고 주장할 정도로 회의적이었다. 이런 경향 둘 다에 맞서서 칸트는 철학은 자체의 기초를 면밀히 조사하여 설명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철학이 이것을 행하지 못하고, 그 대신에 형이상학적 사변에 직접 착수한다면, 넌센스만이 초래될 것이다. 칸트의 경우에, 그리고 그때 이후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경우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것이 참이라는 우리 주장을 정당화하는지 설명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그저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존재론에 대한 인식론의 이런 우위는 나무랄 데가 없는 듯 보인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은 꽤 문제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결국 우리가 만나는 세계 속 사물들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만나는 우리 나름의 과정에 관해 말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정말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현상사물들이 우리에게 현시되는 양태뿐이라고 역설한다. 칸트 이후 수 세기 동안 이것은 일종의 공통 감각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세계에 적용하는 독자적인 부과물들의 왜곡 렌즈들을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사물들을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오늘날 이런 부과물들은 칸트의 범주들을 넘어서 언어, 우리의 특수한 인지 메커니즘 그리고 우리의 문화적 편향과 이데올로기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인식론적 성찰은 중요한데, 그것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편견과 의심받지 않은 가정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그런 성찰 때문에 우리가 이런 편견과 가정들에서 벗어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각들에 갖혀 있어서 여타의 견해를 취할 수 없다. 어쨌든 우리가 모든 것다른 사람들, 다른 살아 있는 존재자들 그리고 우주 속 다른 것들을 우리 자신의 모습대로 고치는 것의 위험에 관해 걱정하는 것이 사실상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치르는 비용은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만 말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충분히 멀리 밀고 가면, 우리는 세계란 인위적인 사회적 또는 언어적 구성물일 뿐이며, 세계는 우리 자신이 그것에 집어넣은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믿게 된다. 이십 세기 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그리고 더 미묘한/복잡한 방식으로,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 같은 사상가들의 탈근대적 철학의 경우에는 이런 구속복에서 벗어날 길이 전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지적하고 개탄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벗어날 수 있고, 그래서 진정으로 다른 무언가를 만날 수 없다.

이십일 세기에 철학적 사변의 부활은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인식론의 칸트적 우위를 무화시키고자 하는데, 그런데 그것은 매우 칸트적 이유에서 이것을 행한다. 칸트 자신의 인식론의 격상과 형이상학적 사변의 금지는 독단적 합리주의라는 스킬라와 경험론적 회의주의라는 카리브디스 둘 다를 피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인식론의 격하를 동반하는 칸트의 반전은 맹목적인 이성중심주의와 민족중심주의라는 스킬라와 무한한 해체와 자기 비판이라는 카리브디스 둘 다를 피하고자 하는 비슷하게 고무된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사변이 모든 가능한 지식의 경계를 침범하기 때문에 칸트는 사변을 비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새로운 사변적 사상가들의 경우에는 바로 지식의 한계 때문에 사변이 필요하다. 실재적인 것은 그렇게 존재하지만,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십일 세기 사변은 우리의 단단한 지식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독단적 주장을 제기하기는 커녕, 이 새로운 형태의 사변은 역설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의 공간과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의 시간을 탐사한다.

2007년에 네 명의 철학자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 레이 브래시어(Ray Brassier) 그리고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가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표제어 아래 런던의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각자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서로 그리고 서로의 작업을 얼마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때때로 비교적 균일한 집단으로 간주되었지만, 그 이후로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표제어를 포기했다. 그리고 사실상 이 사상가들 사이의 차이가 매우 커서 그들은 단일한 철학 학파를 이룬다고 할 수 없다. 그래도, 이 사상가들이 최소한 중요한 출발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가리키는 데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레이블이 여전히 유용하다. 하만의 말에 따르면, "사변적 실재론자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은 '상관주의'에 반대하는 것뿐인데, 상관주의는 모든 철학을 인간과 세계의 상호 작용에 정초하는 그런 종류의 철학(오늘날에도 여전히 지배적인)을 가리키는 메이야수의 술어이다."

사변적 실재론은 세계 및 세계 속 사물들의 우리 자신의 개념화로부터의 독립성을 역설한다. 그것은 세계의 질서는 우리 마음(또는 우리 언어 또는 문화)이 그것을 구성하기 위해 작동하는 방식에 의존한다는 칸트적 테제를 거부한다. 또한 그것은 자아와 세계, 또는 주체와 객체, 또는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 사이의 원초적인 호혜성 또는 대응성이라는 현상학적 가정을 거부한다. 실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기묘하다. 사물들은 우리가 그것들에 관해 지니고 있는 관념들에 결코 들어맞지 않는데, 그것들에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항상 존재한다. 세계는 우리 자신의 인지적 범형과 서사적 설명 양태들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변이 필요하다. 우리의 고질적인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서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비인간 세계의 존재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변을 전개해야 한다.

미리 결정된 한 가지 사변 형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변은 적절한 결말에 대한 아무 확신도 없는 미지의 것으로의 항해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로운 철학적 사변(philosophical speculation)과 궁극적으로 이익을 낼 목적으로 항상 실행되는 금융 투기(financial speculation)가 대조될 수 있다. 오늘날 파생 상품 시장에서 실행되는 헤지 펀드의 투기는 위험(risk)을 계산하고 수량화하는 한 방식으로 간주된다. 시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투자자들은 확률의 법칙들을 고려함으로써 이익을 낼 수 있다. 그러므로 금융 투기는 미래를 관리하고 제어하는 한 방식이다. 그것은 미래가 현재와 정합적일 것이라는 의심받지 않은 가정에 의존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형이상학적 사변은 위험이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불확실성을 대면한다. 이런 구별짓기는 위대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다. 위험은 고정된 수의 가능한 결과들 사이에 확률을 분배하는 통계적 규칙들에 의해 관장되는데, 동전 던지기 또는 주사위 던지기를 고려하라. 그런데 불확실성은 확률론적 견지에서 수량화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결과들이 가능한지 알 길이 없는데, 그것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무언가가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경제학자와 금융 전문가들은 케인스의 분석을 무시하고, 그래서 파생 상품과 선물 시장이 불확실성이 아니라 위기의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잘못 가정한다. 그렇지만 경제학에서의 실정이 어떻든 간에, 철학적 사변은 관리할 수 있는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전적으로 기본적인 불확실성의 문제이다. 그런 사변 과정을 인도할 공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사변적 실재론 사상가들은 각자 우리로부터 떨어져 알 수 없게 존재하는 세계에 관한 사변을 전개하는 상이한 방식을 제시한다.

<<풀려난 허무(Nihil Unbound)>>에서 레이 브래시어는 칸트의 인식론적 관심사, 즉 우리가 세계에 관해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방식들을 관장하는 범주와 규제적 이상들또는 오늘날 우리가 합리성의 규범이라고 부를 확률이 더 높을 것에 대한 주장을 전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브래시어가 이런 규범을 암묵적으로 인간중심적인 칸트의 초점에서 떼어낼 때, 그는 칸트를 넘어서서 일종의 급진적 사변에 관여한다. 브래시어의 경우에, 인과성 같은 칸트의 범주들은 세계에 인식 가능한 어떤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마음이 세계에 부과하는 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 마음에 불투명하고 이질적인 사물들에 접근하고자 할 때, 이런 방법과 가정들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다. 합리성은 소름이 오싹 끼칠 만큼 비인간적이다. 물리과학 덕분에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의 척도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은 세계를 개념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과학적 기획은 결코 완결돠거나 최종적일 수 없는데, 세계는 궁극적으로 비개념적인 것이고 개념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에 관한 우리의 관념들은 사물 자체에 결코 딱 맞을 수 없다. 칸트의 경우에, 이것은 우리가 현상, 즉 단순한 외양들의 영역에 귀속되어 있다그렇지만 또한 그 내부에서 안전하게 정초되어 있다는 점을 의미했다. 그런데 브래시어의 경우에, 우리가 끊임없이 사물 자체에 접근함(그런데 결코 최종적으로 이르지는 못한다)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여기곤 하는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 우리가 우주에 부과하기 위해 헛되이 노력한 모든 의미, 가치 그리고 서사들을 벗겨내면, 우주는 본원적으로 공허하고 무심하다. 위로가 되는 우리의 전제들은 용해되고, 그래서 아무 근거도 없는 사변만이 우리에게 남게 된다.

<<유한성 이후>>라는 중요한 책에서, 알랭 바디우의 제자였던 퀑탱 메이야수는 칸트를 안팎으로 뒤집고, 칸트가 거부했던 그런 종류의 존재론적 사변에 대한 필요를 브래시어와 전적으로 상이한 방식으로 갱신한다. 메이야수는 칸트주의와 현상학의 "상관주의적" 가정들에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그는 자신이 선조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역설하는데, 선조성은 인류, 또는 어떤 형태의 생명에도 선행하는, 그래서 관찰되고 해석되거나 평가받을 어떤 가능성에도 선행하는 우주의 분명한 존재를 가리킨다. 칸트는 무엇이든 어떤 형태의 존재에도 논리적으로 선행해야 하는 "경험의 선험적 조건"(이것은 존재자에 의해 항상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을 확립한다. 그런데 메이야수는 이런 조건 자체가 세계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생성되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출현하기 전에 우주는 이미 존재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지"거나 우리의 범주들에 따라 조직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칸트에 의해 확립된 마음과 세계 사이의 상관관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통찰로부터 나아가서 메이야수는 본원적 우연성이 유일한 보편적 필연성이라고 추론한다. 그는 세계가 현재의 모습과 달리 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상황은 아무 이유도 없이 일어날 수 있다. 이른바 "자연 법칙"조차도 임의로 변하거나 사라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메이야수는 사변을 통해 진리를 발견한다또는 더 좋게 말하자면, 사변의 진리를 확립한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우리 자신의 오성 능력의 한계 때문에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반면에, 오히려 메이야수는 바로 이런 불가지성이 사물 자체의 실정적인 특성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객체지향 존재론으로 부르는,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그레이엄 하만의 판본은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와 마누엘 데 란다(Manuel De Landa) 같은 사상가들을 언급하면서 우리와 독립적인 사물의 존재에 대한 다른 한 접근방식을 취한다. <<게릴라 형이상학(Guerilla Metaphysics)>> <<네겹의 객체(The Quadruple Object)>>를 비롯한 다양한 사변적 저작에서 하만은 칸트의 가장 기본적인 주장들 가운데 하나를 증보함으로써 칸트를 수정하고 사변의 필요성을 다시 도입한다. 칸트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물에 부과하는 틀로 그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반면에, 하만은 이 상황을 우주 속 모든 존재자에게 일반화한다. 세계를 특수한 한정된 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인간, 즉 합리적 존재자들만이 아니다. 세계는 다수의 객체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런 객체들 가운데 어느 것도 피상적인 방식을 넘어서 여타의 객체(심지어 자체에게도)에 접근할 수 없다. 하만의 경우에, 우리 지식의 유한성, 즉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역설할 때 칸트는 옳다. 그런데 최소한 그런 한계 내에서 완전하고 확실한 인간중심적인 구조들을 확립하기를 요구할 때 칸트는 그르다. 우리는 세계에 조건을 부과하기보다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제한된 능력 내에 갖히게 된다. 칸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사물에 관해서는 사변을 전개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만은, 우리가 사물 자체를 알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사변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응대한다. 우리는 객체를 인지적으로 파악할 수 없지만, 은유와 다른 심미적 실천을 통해서 객체를 암시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사물을 전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에 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사변의 길인데, "실재적인 것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만 있는 것이다."

브래시어와 마찬가지로 닉 랜드(Nick Land)의 학도였던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는 <<셸링 이후의 자연에 관한 철학들(Philosophies of Nature After Schelling)>>에서 다른 한 판본의 사변을 제시한다. 칸트 자신의 철학에서 "경험의 선험적 조건"은 모든 인지가 따라야 하고 따를 필요가 있는 선재하는 구조이다. 그런데 그랜트는 칸트 이후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셸링을 좇아서 이런 구조 자체가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생성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선험적인 것모든 경험에 선행하고, 경험을 위한 조건을 확립하는 것은 결코 정적인 산물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진행 중인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셸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랜트의 경우에도 "선험적인" 것은 오직 자연 자체의 진행 중인 무한한 생산성과 동일시될 수 있다. 이런 모든 사상가들에게 사변은 필연적인 것인데, 그것이 우리가 우리 육체와 마음을 생성하지만 우리 마음과 육체로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힘, 역능 그리고 사건들을 추적하고자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모두 형이상학적 사변에 대한 칸트의 금지를 우회하는 방식을 찾아낸다. 그들은 칸트가 존재론보다 인식론을 우위에 둔 것에서 비롯되는 인간중심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작업한다. 메이야수와 브래시어의 경우에, 칸트적 인식론의 제약을 극복하는 방식은 칸트에 의해 발견된 가능한 지식에 대한 한계가 우리 자신의 인지 역량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환원 불가능하게도 우연적(메이야수)이거나 비개념적(브래시어)인 사물 자체의 특징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하만과 그랜트의 경우에는 인간 인지에 부여된 특권 자체가 의문시되어야 한다. 인간 지각과 오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보다 덜 특별한데, 그것들은 관계와 인과적 영향의 과정들의 훨씬 더 넓은 스펙트럼에 속하기 때문이다. 솜 덩어리를 사색할 때 내가 행하는 것은 솜 덩어리를 물들일 때 염료가 행하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고, 또는 그 점에 있어서 솜 덩어리를 태울 때 불이 행하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 하만의 경우에, 이것들은 모두 또렷히 개별적인 존재자들 사이의 "대리적 접촉"에 관한 사례들이다. 그리고 그랜트의 경우에, 그것들은 모두 자연의 끊임없는 생산성에 의해 추동되지만 정지되거나 물화되기도 하는 변형들이다. 인식론에 우위성이 주어질 수 없는데, 이해와 앎 자체가 그것들이 자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더 큰 운동 내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 사상가들은 모두, 더 고등한 "독단적" 진리을 발견하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메이야수가 존재의 "거대한 야외"라고 부르는 것엄청나게 방대하고 기묘하며 본원적으로 불확실하여 우리 자신의 가치와 규범으로 포괄할 수 없는 영역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사변을 수용한다.


2015년 9월 14일 월요일

실재론, 반실재론, 존재론

http://blog.daum.net/nanomat/118

- 아래의 인용문은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의 블로그 글 <<실재론, 인식론, 과학, 그리고 과학주의(Realism, Epistemology, Science, and Scientism)>>에서 일부를 옮긴 것이다.

――――――――――――――――――――

[...]
"실재론", "반실재론", "인식론", 그리고 "존재론"이라는 술어들을 사용하여 가능한 네 가지 입장을 구별하자.
[...]
1. 실재론적 인식론(Realist Epistemology): 실재론적 인식론은 우리가 세계의 객체들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는 입장인데,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표상들이 그것들 자체와 정확히 같을 것이다. 여기서 정신은, 세계의 객체들로부터 데이터를 있는 그대로 그저받은 다음에 충실하게 보고하는, 수동적인 세계 수용자로 취급된다.

2. 반실재론적 인식론(Anti-realist Epistemology): 반실재론적 입장은 훨씬 더 복잡하다. 여기서는 인식자가 수동적인 수용자가 아니라, 입력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는데, 개념, 실천, 언어, 사회적 범주 등을 통해 입력을 조직하여 인식자의 경험의 층위에서 이런 입력에 특정한 형식이나 구조를 부여한다. 여기서 나는, 블랙박스 모형이 반실재론적 인식론과 실재론적 인식론 사이의 차이에 관해 생각하는 가장 쉬운 방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재론적 인식론은 수용된 자극을 기록만 할 뿐인 수동적인 수용자로 다루는 반면에,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은 세계로부터의 자극을 이후에 블랙박스의 구조(언어, 사회적 범주, 정신의 선험적 개념 등)에 의해 처리되는 입력으로 여기는데, 블랙박스는 자체를 거치는 자극을 처리하여 그것과 다른 출력을 산출한다. 내가 보기에, 블랙박스 모형은 모든 반실재론적 입장에 공통적이다. 그것들이 다른 지점, 그것들이 논쟁를 벌이는 논점은 그 블랙박스가 어떤 처리 메커니즘을 포함하고 있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물론 반실재론적 인식론은 당연히 인간중심적일 것인데, 지식에 관한 문제는 우리인간들이 세계를 어떻게 알게 되는지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3. 반실재론적 존재론(Anti-Realist ontology): 존재론은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라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의미에서 무엇이 존재하며 어떤 동역학이 이런 존재자들을 지배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그러므로 반실재론적 존재론은 존재자들의 존재―존재자들은 무엇인가―를 우리의 작은 블랙박스의 출력과 등치시키는 존재론이다. 그 논제에 따르면, 존재는 블랙박스의 출력―(데리다가 <<그래마톨로지>>에서 서술한 대로) 표명, 또는, 칸트가 서술한 대로, 현상―이라는 것이다. 반실재론적 존재론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존재는 두 가지 의미로 진술된다는 점을 유의하자. 한편으로, 존재는 블랙박스의 출력과 등치된다. 그렇지만 출력은 입력 없이는 블랙박스에 의해 산출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입력은 어딘가에서 와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블랙박스(여기서 블랙박스는 정신과 직관의 선험적 범주들, 디페랑스의 작용, 현존재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것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에 대해 입력을 제공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한 유형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요약하면, 반실재론적 존재론들은 헤겔적 또는 버컬리적 경로를 택하지 않는다면 존재를 일의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4. 실재론적 존재론(Realist ontology): 반실재론적 존재론자들이 "존재란 (우리에 대한) 현상이다"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실재론적 존재자들은 우리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존재자들이(예를 들면, 화폐) 있지만, 이것이 존재의 전부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창을 통해 나무를 바라볼 때] 나무가 창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의미에서 인간들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들도 있으며, 우리는 존재가 의미하는 바의 특질들에 관해 매우 일반적이지만 유의미한 것을 말할 수 있다.

인식론에 대한 이런 두 가지 가능성과 존재론에 대한 이런 두 가지 가능성을 개략적으로 언급되었으니 이제 이런 입장들의 조합들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알아챌 것이다. 그런 입장들이 세 가지 있다.

1. 실재론적 인식론과 함께 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실상 실재론적 인식론을 옹호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한다.

2. 반실재론적 인식론과 반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대륙철학의 지배적인 입장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3. 반실재론적 인식론과 함께 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이 옹호하는 것은 세 번째 입장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은 올바르게도 실재론적 인식론을 소박하며 독단적인 입장이라고 거부한다. 우리가 사물들을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이나 학문들 내부의 학문분과적 경계들이 존재하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지도를 그린다고 가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 게다가 자신들의 인식론적 탐구에서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은 올바르게도 현상을 조직하고, 지식을 생산하며, 기타 등등에 있어서 블랙박스에 의해 수행되는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우리는 우리의 블랙박스가 출력의 산출에 기여하는 바에 관한 이런 논쟁들을 가져야 하고, 반실재론적 인식론의 전통이 발견한 중요한 결과들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과 실재론적 존재론자들이 갈라지는 지점은 존재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에 관한 의문들이 존재들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데 충분하다라는 논제에 대해서이다.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의 경우에는, 우리가 저쪽에 있는 객체들을 어떻게아는지에 관한 의문들을 넘어서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에 관한 중요하고 결정적인 의문이 여전히 있다. 이 의문은, 로이 바스카를 따르면, 실재론적 존재론자들의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에 의해 철저히 규명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객체지향 존재론자는 우리 지식의 한계, 무엇이든 어떤 특수한 유형의 객체를 알기 위해서는 탐구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 기타 등등을 쉽게 인정하지만, 탐구에서 그리고 탐구를 통해서 발견되는 차이들이 출력의 영역에만 속하는다는 논제는 거부한다. 오히려 실재론적 존재론자는 이런 차이들이 출력에만 한정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런 차이들을 산출하는, 정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입력, 즉 세계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

번역: 김효진

신실재론 입문 - 부정성, -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http://blog.daum.net/nanomat/774

1부
부정성(Negativity)

――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신실재론 입문(Introduction to New Realism)>>, pp. 17-33.

지난 이 세기 동안(최소한) 그리고 탈근대주의에서 절정에 이른 과정을 거치면서 철학과 문화는 부정성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근대 시대와 탈근대 시대를 특징지운 기본적 관념은 역사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세계에서 많은 것들이 구성되고, 그래서 해체되고, 비판받으며, 변형될 수 있고 변형되어야 한다는 신성 불가침의 믿음이었다. 여기서 사실상 우리는 항상 부인하는 정신의 승리를 목격했는데, 그것은 의회 민주주의, 근대 과학, 성 평등 등―물론, 모든 종류의 재난들과 더불어―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지만 이런 부정성은 통제할 수 없는 과정과 더불어 특히 호수와 산을 비롯한 모든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관념을 촉발했다. 확실히 그런 관념은, 이른바, 세계들의 구성자들이 되는 개인들의 권력에의 의지를 부양한다. 그런데 동시에 그것은 모든 사람이 (외관상)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며 진리와 허구 사이의 차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거짓 해방에 이르는 길로서 제시된다. 그것은 내가 '리얼리티즘(realitism)'('리얼리티 쇼'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낱말)라고 부르는 것의 세계이고 탈근대주의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는 듯 보인다.

탈근대주의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쇼펜하우어의 원리는 동등하거나 공존하는 존재자들로 간주하게 된(이것이 그 시대의 독특한 특질이다) 매체 체계와 탈근대성의 근본적인 존재론적 원리가 되었다. 결국 다음과 같은 것이 참된 위대한 탈근대적 이론이었다. 실재는 구성되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실재는 불특정한 인류의 표상들과 독립적으로 현존할 수 없다. 이 이론은 탈근대성에서 매체의 과도한 증강을 설명하는데, 사실상 탈근대주의는 매체 '허구화'로 대체된 실재의 종말을 선언하는 역사 철학으로 자처한다. 니체를 좇아서 실재적 세계는 동화가 되어 버렸고, 그래서 사실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해석만 존재한다면, 매체학은 존재론이 되고 매체는 실재의 구성자로 변환되는데, 이것은 걸프 전쟁을 순전한 매체 발명품으로 간주한 보드리야르(Baudrillard)뿐 아니라 제국의 권력은 영화 제작업체와 꼭 마찬가지로 실재를 구성할 수 있다고 믿은 것으로 유명한 칼 로브(Karl Rove)와도 일치한다.

이 원리는 내가 탈근대적인 공통의 것들(koine)을 요약한다고 제안하는 세 가지 중요한 점들로 명시적으로 표명된다. 첫째는 아이러니화(ironisation)인데, 이것에 따르면 이론(또는 심지어 낱말들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을 진지하게 간주하는 것은 일종의 독단주의를 나타내고,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진술로부터 역설적인 초연함―철자법적으로는 인용 부호로 표현되고, 심지어 물리적으로는 구두 연설에서 인용 부호를 나타내기 위해 손가락을 구부림으로써 표현된다―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는 탈승화(desublimation), 즉 욕망이 자체적으로 한 가지 해방 형식을 구성한다는 관념인데, 왜냐하면 이성과 지성은 지배 형식이고, 그래서 해방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느낌과 육체를 통해서 추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탈객관화(deobjectification), 즉 사실은 전혀 없고 해석만 있을 뿐이라는 가정인데, 이것으로부터 우호적인 연대가 무심하고 폭력적인 객관성을 지배해야 한다는 따름 정리가 도출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내가 인문학과 철학의 '직업적 반실재론'으로 부르자고 제안하는 것의 기원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 과학(그런데 우리는 간단히 '과학'이라고 해도 무방하다)이 실재와 객관성의 권역 전체를 담당하는 듯 보이는 시기에 철학자라는 것은 실재는 현존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리고 실재는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언어에 의해 결정되며, 패러다임 등에 의해 제조된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과학의 시대에 인문학은 어떤 존중할 만한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구성하고, 인문학자들은 해체한다. 세 가지 기본적인 선택지가 존재한다. 해체주의적 반실재론자, 과학주의의 (실재론적 또는 구성주의적) 옹호자 그리고 부정적 실재론자(이 경우에 진리와 실재는 과학의 특권이다).

내 의견으로는, 왜 지성적인 사람들(탈근대적 철학자들이 그랬듯이)이 로티(Rorty)―내 의견으로는 푸코, 데리다 그리고 들뢰즈보다 덜 독창적이지만, 탈근대적 역설들에 이론적 형식을 부여하려고 시도한 유일한 사람이다―가 올바르게도 '역설적인 이론(ironic theory)'으로 불렀던 것을 실천하면서, 진리의 대응물이 전혀 없이, 돌발적 발언이나 과장된 표현을 표명하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지 자문할 가치가 있다. 나는 그 이유가 내가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지난 이 세기 동안 철학은 과학에 예속되거나(실증주의, 그런데 삼십 년 전에 '인간 과학'의 대유행도 생각하자) 아니면 과학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과학자와 반과학자들이 모두 실재에 관한 지식은 과학의 특권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두 범주의 구성원들은 아프면 의사에게 간다) 반과학자들은 게다가 반실재론자가 되고, 그래서 인간은 최근의 발명품이며,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등의 주장들을 표명하게 된다. 그런 주장들을 비판하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그것들은 진지하게 간주하는 것일 것이다. '인간은 최근의 발명품이라고 말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까닭을 말해야 한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면, 이 순간에 당신이 현존하고 있는 텍스트를 제시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퍼트넘에 의해 사용된 표현을 차용하면, '안개와의 주먹다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이것이 헛된 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 덕분에 우리는 탈근대주의가 독일 관념론의 위기의 말기(언제 '철학의 죽음'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었는지 기억하자)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실재는 과학에 속하고, 그래서 철학에게는 대단치 않은 것들―신학, 영성주의, 정신주의, 개인적 열상, 인간 세계, 생활 세계; 형이상학의 극복, 해체,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사유'의 탐색 같은 현장 활동; 철학사 또는 역사적 지식으로서의 철학; 정치적 운동주의로서의 철학, 탈근대주의, 사실은 전혀 없고 해석만 있을 뿐이다; 구피, 플루토 그리고 도널드 덕의 철학(팝소피아)―이 남게 된다. 이런 불편함의 가장 명백한 증상들 가운데 하나는, 하이데거는 심지어 탈은폐로서의 진리에 관한 대안적 이론―즉, 여타의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반면에 철학자들에게만 적용되는(철학자들이 철학을 하고 있지 않다면 그들에게도 적용되지 않는) 철학자들을 위한 진리―을 개발했었어야 했다는 사실이었다.

분석 철학도 역시 이런 잔류화의 전략에 동참했다. 소피스트(부정하게 논증하는)와 과학자(실재에 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논증할 필요가 없는)들과 달리 철학자는 제대로 논증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떤 근거에서 논증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물론 나는 매우 조악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내 목적은 탈근대적 반실재론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점을 설명하는 것이다. 만약 상황이 이렇다면, 실재론을 역설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거나 자명한 무언가를 역설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대 철학의 거동에 있어서 무언가가 불필요하게 자기 제한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포퓰리즘

포퓰리즘(populism)은 해방에 대한 탈근대적 희망의 기반을 약화시킨 모든 정치들 가운데 첫 번째의 것이었다. 매체 포퓰리즘의 등장은, 대량 파괴 무기들에 대한 허위 증거에 의거하여 전쟁을 개시하는 지경에 이른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로서의 진리의 거리낌 없는 사용은 말할 것도 없이, 결코 해방적이지 않은 실재에의 작별의 일례를 제공했다. 매체와 몇 가지 정치적인 프로그램들에서 우리는 "사실은 전혀 없고 해석들만 있을 뿐"이라는 니체의 원리―겨우 몇 년 전에 철학자들이 해방에 이르는 길로서 제안했지만 사실상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말하고 행하는 것에 대한 정당화로 제시되는―의 실재적 결과를 보았다. 그러므로 니체의 구호의 진정한 의미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가장 강한 자의 이유가 항상 최선의 것이다.' 이런 환경은 분석적 세계에 있어서 반실재론의 종말과 대륙적 세계에 있어서 반실재론의 종말 사이의 약간의 시간 간격을 설명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동안에 여전히 분석적 반실재론은 대부분 존재했고 대륙적 반실재론은 비교 문학 학과들에서 여전히 존재했다.

그런데 21세기에는 실재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오히려 신매체는 증강된 실재, 즉 결코 가상적이지 않는 기록물, 고착물, 기입물, 문서들의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드러내었는데, 통화 기록이 범죄로 기소된 사람의 알리바이를 날려 버릴 때처럼 사실상 그것들은 흔히 너무나 실재적이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성공적인 앱들 가운데 하나로서 근처의 주유소, 레스토랑, 약국 등의 위치를 알려주는 '어라운드미(AroundMe)'라는 앱을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는 컴퓨터들이 우리로 하여금 제2의 전적으로 가상적인 삶으로 진입하게 하는 수사법에 의해 흔히 언급되는 것과 매우 다른 무언가를 목격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  삶, 우리가 갖는 유일한 삶에 속하며, 그리고 우리는 정보로 풍성해진 이런 증강된 현실의 효과를 너무나 잘 지각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 지점에서는 돌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의 짧은 가상적 꿈이 방금 먹은 것에 대한 서술까지 섭렵하는 문서들로 가득찬 페이스북에서의 매우 실재적이고 흔히 자책적인 편재에 압도당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심지어 그런 앱들을 너머 기록이라는 단순한 행위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실재(즉, 나중에 내가 밝히듯이, '인식론적 실재'라고 부르곤 하는 것)의 추산할 수 없는 증가를 낳는다. 오늘날에는 <지나가는 어느 여인에게(A une passante)>에서 보들레르에 의해 서술된 것―사라져서 결코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덧없는 아름다움―과 같은 경험―어쨌든 참신성과 일시성으로서의 근대성의 본질인 포의 '네버모어(nevermore)'을 떠올리게 하는 경험―을 갖는 것은 근본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오늘날 보들레르는 자신의 모바일 폰으로 지나가는 여인의 사진을 찍을 수 있고, 그래서 페이스북에서 친구 요청으로 그녀를 추적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건이 참신성, 덧없음 그리고 일시성보다 반복, 보존 그리고 다시 쓰기에 유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언급했듯이, 모든 행위가 기록된다는 사실은 실재를 두드러지게 증가시킨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이미 컴퓨터들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에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은 것을 자각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자료에 파묻혀 있다는 것이며, 그리고 이제 우리는, 예컨대, 유튜브를 검색하면 이것을 정말로 깨달을 수 있다.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거래, 그리고 특히 우리의 모든 연구는 대규모의 초국가적 존재자들에 의해 기록되고, 그래서 훨씬 더 광범위한 통제권을 행사하는데, 사회적 연결망에 자신에 관한 정보를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사람들은 통제되는 사람들이다. 이런 환경은 다른 한 고찰을 시사한다. 모든 것이 기록되는 시기에 제공될 수 있는 유일한 보호는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법률은 항상 해커들에 의해 쉽게 우회될 수 있기 때문에 법률적 어려움보다도 훨씬 더)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푸칸트(푸코 + 칸트)

탈근대적 리얼리티즘(realitism)은 정치적으로 고무된 반실재론이다. 지금까지 탈근대주의는, 실재는 지배의 목적을 위해 권력에 의해 실제로 구성되며, 그리고 지식은 해방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권력의 도구라는 관념을 계발했다. 나는 이런 태도의 기저에 놓여 있는 철학적 사고 방식을 '푸칸트(Foukant)적'이라고 명명할 것인데, 푸칸트라는 허구적 사상가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식에 직접 접근할 수 없고 생각한다는 것은 반드시 우리의 표상들을 동반해야 한다고 믿으며, (사상의 최초 단계에서 푸코와 마찬가지로) 그는 생각한다는 것과 우리의 개념적 도식들은 권력에의 의지를 확언하는 수단이라고 간주한다. 푸칸트의 테제는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삼단 논법에 놓여 있다. 실재는 지식에 의해 구성된다. 지식은 권력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므로 실재는 권력에 의해 구성된다. 따라서, 급진적인 탈근대주의에서는 한 가지 논리적인 단계를 거쳐서 실재는 권력의 구성물인 것으로 판명되는데, 그래서 실재는 가증스러운 것('권력'이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을 의미한다면)이자 가변적인 것('권력'이 '우리의 권력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이 된다.

이 삼단 논법은 세 가지 오류로 명확히 표명된다. 첫 번째 오류는 존재-지식의 오류, 즉 존재론과 인식론 사이, 즉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사이의 혼동이다. 내가 물은 H_2O이다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언어, 도식 그리고 범주들이 필요하다는 점은 명료하다. 그런데 물은 바로 H_2O이다라는 사실은 나의 어떤 지식과도 전적으로 독립적인데, 그래서 화학이 탄생하기 이전에도 물은 H_2O였고, 우리 모두가 지구에서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대체로, 비과학적 경혐의 경우에, 내가 알든 모르든 간에 언어, 도식 그리고 범주들과 독립적으로 물은 축축하고 불은 타오른다. 실재 속 무언가가 우리에게 저항한다. 그것이 내가 '수정 불가능성(unamendability)'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실재적인 것의 특이한 특질은 그것이 마음대로 수정되거나 교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제약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 덕분에 우리는 꿈과 실재, 과학과 마술을 구별지을 수 있다.

두 번째 오류는 확인-수용의 오류인데, 이것에 의거하여 탈근대주의자들은 실재를 확인하는 것은 현존하는 사태를 수용하는 것에 놓여 있고, 그래서 거꾸로(논리적 간극이 있지만) 반실재론은 본질적으로 해방적인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런데 명백히 그렇지 않다. 반실재론은 묵종을 수반한다. 진단이 치료의 전제가 되는 것과 동일한 평범한 이유 덕분에 오히려 실재론자가 (원한다면) 비판하고 (할 수 있다면) 변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

세 번째 그리고 본질적인 오류삼십 년 전에 탈근대주의를 거대한 반계몽주의적 물결로 간주한 하버마스의 견해를 확인하는는 지식-권력 오류인데, 이것에 따르면 어떤 형태의 지식의 배후에도 부정적인 것으로 경험되는 권력이 숨어 있다. 결과적으로, 자체를 해방과 관련시키는 대신에 지식은 예속의 도구가 된다. 이런 태도는 독특한 '지식에 대한 공포'를 무심코 드러낸다고 올바르게 주장되었지만, 공포와 더불어 '무지는 축복이다'라는 확신―<<매트릭스(The Matrix)>>에서 사이퍼에 의해 간결하게 표명된―도 존재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결과들을 초래한 책임이 있는 계몽의 변증법으로, 지식에 대한 비판은 지식 자체로부터의 도피로 변환된다.

데칸트(데카르트+칸트)

푸칸트의 삼단 논법의 대전제('실재는 지식에 의해 구성된다')는, 내가 언급했듯이, 현대 철학의 주류를 대표하는 구성주의에서 강력한 이론적 정당화를 찾아낸다. 그런 시각은 우리의 개념적 도식과 지각적 장치들이 실재의 구성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칸트에서 절정에 이르는 이런 견해를 구현하고 있는 허구적 철학자를 '데칸트(Deskant)'라고 부를 것인데, 그 다음에 그 견해는 니체에 의해 허무주의적 의미에서 급진화되거나, 아니면 인식론적, 해석학적, 심리적 의미에서 전문화되었다. 이런 입장은 내가 선험적 오류로 규정하는 것에서 비롯되는데, 그 오류는 이미 언급된 존재론과 인식론 사이의 혼동에 놓여 있다. 그것의 기원에는 데카르트, 흄, 칸트 그리고 헤겔에서 찾아낼 수 있는 어떤 전략이 존재한다. 지식은 무엇보다도 감각적 지식이지만, 감각은 기만적이고, 그래서 우리는 개념적 지식으로 변환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성주의는 더 이상 안정성을 갖추고 있지 않고, 햄릿이 서술했듯이, '어긋나 버린' 세계를 구성을 통해서 다시 정초할 필요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시작되지만, 경험이 구조적으로 불확실하다면, 과학을 통해서 경험을 정초하는 것이 필요할 것인데, 그래서 경험의 불확실성을 안정화하는 선험적 구조들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객체가 아니라 주체에서 출발하고, 학자로서가 아니라 판관으로서 자연을 심문하는 물리학자들의 모형을 좇아서, 즉 도식과 정리들을 사용하여 사물들이 자체적으로 어떠한지 자문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알게 되려면 그것들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 자문해야 한다.

그래서 데칸트는 선험적 인식론, 즉 수학을 채택하여 존재론을 정초하는데, 종합적인 선험적 판단들의 가능성 덕분에 우리는 어떤 지식을 통해서 유동적인 실재를 고정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선험 철학은 구성주의를 수학의 권역에서 존재론의 권역으로 이동했다. 물리학과 수학의 법칙들은 실재에 적용되며, 그리고 데칸트의 가설에서 그것들은 과학자 집단의 고안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감각들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지식은 더 이상 감각의 비신뢰성과 귀납의 불확실성에 의해 위협당하지 않을 것이지만, 우리가 치러야만 하는 댓가는 어떤 객체 X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객체 X를 알고 있다는 사실 사이에 어떤 차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칸트는 우리로 하여금 현상적 객체 X의 배후에 본체적 객체 Y, 즉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물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환기하지만, 존재의 권역이 대체로 가지적인 것들의 권역과 일치하며, 가지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구성 가능한 것과 동등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그러므로 선험적 오류의 기원에는 주제들의 얽힘이 존재한다.

1. 감각은 기만적이다(감각은 100% 확실하지는 않다).
2. 귀납은 불확실하다(귀납은 100% 확실하지는 않다).
3. 과학은 경험보다 더 안전한데, 왜냐하면 과학은 감각의 기만성 및 귀납의 불확실성과 독립적인 수학적 원리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4. 그렇다면 경험은 과학으로 해명되어야 한다(경험은 과학에 의해 정초되어야 하거나, 또는 최악의 경우에 경험은 과학에 의해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는 '현시적 이미지'로 폭로되어야 한다).
5. 과학은 패러다임들의 구성이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경험도 역시 구성일 것인데, 즉 경험은 개념적 도식들에서 시작하여 세계를 형성할 것이다.

여기에 탈근대주의의 기원이 놓여 있다.

더 자세히 조사함으로써 우리는 문제 전체의 핵심에서 인과성이라는 개념을 찾아낸다. 데카르트의 문제는 인식 주체가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면 세계가 어떻게 인식 주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대신에 칸트의 문제는 인과성이 선험적 주체 자신에 속하는 범주라면 세계가 어떻게 선험적 주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인과성을 자신의 선험적 범주들 사이에 위치시킴으로써 칸트는 스스로를 암묵적으로 관념론적인 형태의 구성주의로 몰아넣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가 주체에 진정한 인과적 효과를 행사하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이것이 데칸트의 테제의 핵심이다. 세계는 주체에 대한 어떤 인과적 역능도 갖고 있지 않는데, 왜냐하면 주체는 세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데카르트)이고 인과성은 전적으로 주체에 속하기 때문(칸트)이다.

데칸트 및 푸칸트와 달리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을 거부하게 되는 <<판단력 비판>>으로 이런 어려움을 이미 자각하게 되었었다는 점을 지적할 가치가 있다. 첫째, 심미적 판단에 대한 비판에서 칸트는 아름다운 것은 아무 개념 없이 애호된다고 적었는데, 다시 말해서, 그는 개념성을 권좌에서 몰아내었으며 지각이 특히 중요한 영역에서 그랬다. 둘째, 목적론적 판단에 대한 비판에서 칸트는 과학론을 명시적으로 제시했는데, 즉 자연은 자체적으로 아무 목적도 없으며, 자연을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도록 그것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들이다. 세째, 칸트는 단일한 사례에서 시작하여 일반적 규칙으로 상승하는, 제3 비판에서 도입된 반성적 판단은 일반적 규칙에서 단일한 사례로 하강하는, 제1 비판의 확정적 판단 다음에 위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그가 가리켰던 것은 확정적 판단을 그저 탐구하기보다는 그것을 대체할 필요성이라고 믿을 만한 좋은 이유들이 존재한다. 사실상, 어느 것을 채용하기로 선택하는 것이 주체에 달려 있게 될 기묘한 이중적 양태에서, 확정적 판단이 어떻게 반성적 판단과 공존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어쨌든, 주체가 반성적 판단에 의지할지라도(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그것만을 사용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은 흄에 의해 제기된 반대 의견들에 대응할 수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사실상 반성적 판단은 모든 점에서 경험주의적 귀납―단일한 사례에서 시작하여 규칙으로 상승하는―이기 때문이다.

티-렉스

내가 푸칸트와 데칸트에 대립시킬 기능, 즉 티-렉스(T-Rex)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인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룡이다. 공룡은 상부 삼첩기(Upper Triassic, 대략 2억3천만 년 전)와 백악기 말기(대략 6천5백만 년 전) 사이에 생존했다. 최초의 인간들과 그들의 개념적 도식들은 몇몇 사람들에 따르면 2십5만 년 전에 나타났고,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5만 년 전에 나타났다. 1억6천5백만 년 동안 공룡은 존재했지만 인간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6천4백만 년 동안 인간도 공룡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5십만 년 동안 인간은 존재했지만 공룡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선재성의 논증(argument of pre-existence)'으로 부르는 이런 환경은 테칸트의 경우에 한 가지 문제를 조성한다. 데칸트의 경우에는 사유가 우리가 경험하는 직접적인 최초의 대상이고, 그래서 사유와 그것의 범주들의 매개를 거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저쪽에' 놓여 있는 세계와 전혀 접촉할 수 없다. 데칸트에 따르면 자연적 객체들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범주들과 더불어 우리 마음 속에만 현존하는 시간과 공간에 정위된다. 사람들이 존재하기 전에는 아무 객체들도 존재하지 않았거나, 또는 최소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객체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지만, 명백히 그렇지 않다. 티-렉스는 푸칸트나 데칸트 이전에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식 주체' 이전에 존재했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다룰 수 있는가?

좋은 움직임은 구성주의자들에 의거하여 언어적-개념적 차원이 실재적인 것을 구성하는 방식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 가능한 경우가 존재한다. 한편으로, 실재는 실제로 우리의 개념들에 의해 구성되고, 그래서 공룡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기껏해야 어떤 인간이 그것들을 발견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마법처럼 나타난 공룡 화석들이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실재는 개념이 아니라 객체들―인간 이전에 생존했던 공룡처럼―로 이루어져 있고, 그래서 개념적 도식들은 공룡들의 모습이 어떠했고 어떻게 살았는지 이해하려고 시도하기 위해, 즉 존재론적 기능이 아니라 인식론적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룡의 유물들을 관련시키는 데 유용할 뿐이다.

이제 개념적 도식들에 대한 세계의 의존성의 가능한 종류들을 가장 강한 것에서 가장 약한 것까지 살펴 보자. 가장 강한 의존성, 즉 존재자는 사유의 상관물로서 현존할 뿐이라고 단언하는(극단적인 상관주의의 형식으로) 사람들에 의해 제시되는 것을 고찰하자. 이 경우에, 존재는 사유에 인과적으로 의존한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강한 판본에서, 객체들의 사유에의 의존성은 명시적인 인과적 의존성이다. 주체가 객체의 인식론적 필요 조건이라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아무튼' 주체는 객체를 초래한다. 인식하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식되는 객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고 이것은 논의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그리고 여기에 인과적 의존성의 옹호자가 놓치는 점이 있다) 그것은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객체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의 기원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버컬리의 유명한 논증―숲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쓰러지고 그 소리를 들을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그것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판본에서는 존재(존재론)가 지식(인식론)에 의존하기 떄문에, 인과적 의존성의 옹호자는 누군가가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확인할 때에야 비로소 그 나무가 실제로 쓰러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공룡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을 때(이 지점에서 이런 종류의 표현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가정하면) 인간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룡은 결코 현존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명백히 도출된다.

인과적 의존성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을 피하기 위해 반실재론자들은 때때로 개념적 의존성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칸트의 유명한 진술의 가능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1) '공룡'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우리는 공룡을 보더라도 공룡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2) '공룡'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우리는 공룡을 보더라도 공룡을 보지 못할 것이다. 칸트를 옹호하는 경우에, 그는 (1)를 의미했다고 한다. 그런데 칸트가 (1)을 의미했었더라면, 그는 <<순수 이성 비판>>을 저술하지 못했었을 것이고,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즉 과학론만 저술했었을 것이다.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을 저술했다면, 그것은 그가 (2)를 의미했었기 때문이다. 개념이 경험 일반을 구성한다. 그래서 도식주의에 관한 장에서 칸트는 심지어 개의 도식도 제시하게 하는데, 그런 도식이 없다면 개는 기껏해야 본체적 현존을 영위할 것이라고 우리는 가정해야 한다. 그런데, 인과적 의존성이 선재성 논증에 의해 무효화된다면, 개념적 의존성은 다음과 같은 상호작용 논증에 의해 무효화된다. 지금 내가 엄청나게 오래 살았거나 부활된 공룡을 만난다면, 그것의 개념적 도식들이 나의 개념적 도식들과 매우 다를 개연성이 있더라도 나는 그것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 '긍정성'에서 내가 전개하듯이,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것들과 대단히 상이한 개념적 도식 및 지각적 장치들을 갖추고 있거나, 또는 전혀 갖추고 있지 않는 존재자들과 상호작용한다.

선재성 논증과 상호작용 논증을 피하기 위해 반실재론자들은 '표상적 의존성'을 언급하는데, 우리는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라, 무정형의 질료로부터 시작하는 우주의 구성자이다. 여기에 현대 철학의 주류가 존재하는데, 내가 보여주었다고 희망하듯이, 그것은 허무주의도 아니고 유아론도 아니라 구성주의, 즉 실재는 저쪽에 존재하지만, 그것 자체는 무정형의 것, 쿠키를 위한 밀가루 반죽, 현상의 구성자가 되는 주체에 의해 주조되는 분화되지 않은 코라(chora)이다라는 관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만나는 세계와 사물들 자체는 현존은 부여받지만 독립성은 부여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물들의 현존은 결코 부인당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단언할 수 있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는 현상에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지 사물들 자체에는 결코 접근할 수 없다고 덧붙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물 자체로 간주하는 것은 철학의 견지에서 최소의 교양을 갖춘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소박성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개별적 현존은 인정받지만, 세계 자체는 어떤 구조적 및 형태적 자율성―적어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도 갖추고 있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물 자체는 잠재적으로 매트릭스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표상적 의존성도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된다. 사실상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한편으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라는 낱말이 우리에 의존하고, 그래서 어떤 중대한 의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인과적 의존성(유일한 중대한 종류의 의존성이다)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티나로사우루스의 존재가 인간들에 의존한다는 것인데,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현존했을 때 우리가 현존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작동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공룡들이 존재했을 때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반실재론자들은 이렇게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당신은 사유에 독립적인 공류의 현존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런데 대답은 단순할 것이다. '증명을 제시해야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다. 여기서 당신은 공룡의 사유에의 의존성, 즉 지금까지 당신이 행하지 못한 것을 증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