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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0일 금요일

덕치, 인치, 법치 노자, 공자, 한비자의 정치 사상



  덕치, 인치, 법치 노자, 공자, 한비자의 정치 사상 
   철학의 부재시대에서 바라 본 우리몸에 맞는 정치철학찾기
  저자/역자신동준 저
  발간일2003년 8월 14일
  가격20,000 원 →회원할인가 18,000 원
  분류연구총서 | 도가/제자철학
  포인트900점


철학이 없어진 현재, 우리 몸에 맞는 정치철학은 없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답하면서 동양의 철학을 정치철학으로 해석하고 있다. 우리의 사상 속에서 발견한 우리 몸에 맞는 정치철학이 깊게 담겨 있는 책이다. 

판형:신국판 | 쪽수:488쪽 

정치철학의 부재 시대, 우리 몸에 맞는 우리의 정치철학은 없는가 ?

동양의 철학을 정치사상으로 해석한 책이 나왔다. {덕치, 인치, 법치} 노자와 공자, 한비자의 사상을 정치사상의 측면에서 접근한 이 책이 바로 그것이다. 그동안 동양의 전통적 정치사상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들은 있었지만 이 책처럼 전격적으로 정치사상에 관한 부분만을 다룬 경우는 처음이다.
일반적으로 동양의 전통사상은 현실성이 결여된 형이상학적 담론으로 이해되어 왔다. 법가의 사상이야 원래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겠지만 유가와 도가, 특히 도가의 사상은 현실을 떠난 고원한 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 책은 동양의 전통사상들이 형이상학적 담론으로 이해되는 현실을 거부한다. 이 책에서는 노자와 공자, 한비자를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정치의 실현을 위해 진력했던 정치사상가로 이해하고 그들의 철학을 현실과는 결코 유리될 수 없는 입세간의 정치사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흔히 정치학이라고 하면 근대 이후의 서양 이론을 떠올리곤 한다. 실제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전통사상 가운데 정치학 이론으로 연구된 분야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우리의 정치는 구미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하고 있고, 정치학 이론 역시 서양의 이론들 일색이다. 그러나 맞지 않은 옷을 몸에 걸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정치 현실은 엉거주춤하다. 현재 채택하고 있는 우리 정치 체제의 뿌리가 얕은 까닭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일제치하의 고통, 분단과 전쟁, 연이은 독재를 겪으며 수많은 멍울을 감추고 있다. 그 상처의 일차적인 원인은 무엇보다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확장과 침략에 있을 것이다. 아편전쟁 이후 동아시아 3국에 몰아닥친 제국주의의 광풍은 전통적인 삶의 조건들을 빠르게 변화시켰는데, 그 과정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정치 분야에 있어서는 기존의 제왕정이 공화정으로 바뀌었지만 짧은 순간에 서양의 정치 체제가 정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뿌리가 얕은 정치 체제가 그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뒤흔들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서양의 정치철학은 이미 그 한계를 드러내었다. 현실 정치의 암울함을 정치 담당자들의 사람됨의 문제로만 치부하기에는 그 폐해가 너무 오래되고 심각하다.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동양의 전통사상에 뿌리를 둔 '통치학'을 역설한다. 저자가 역설하는 통치학은 도가, 유가, 법가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는 새로운 정치사상이다. 이들 사상 가운데 저자는 특히 노자의 사상에 주목한다. 노자는 인간 사회에 발생하는 모든 폐단의 원인을 '과잉된 인위'에서 찾고 절욕과 절제를 주장하였다. 비록 2천 년 이상의 시간상의 갭이 있지만, 과잉된 인위로 인해 갈등과 분열이 만연한 지금 노자의 사상은 한계에 봉착한 서양 정치사상의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상가들의 면모는 다양하다. 저자는 우선 동양 정치사상의 출발점을 관중으로 잡고, 그를 기준으로 도가와 유가, 법가의 정치사상을 분석하고 있다. 도가의 사상가는 노자에 한정되는데, 노자와 더불어 도가 사상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장자의 경우는 출세간적 성향이 너무나 강해 정치사상 분야에서는 언급할 만한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가 사상가는 공자를 중심으로 맹자와 순자를 병행해서 살펴보고 있다. 맹자와 순자는 각기 다른 방향에서 공자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정치사상적 성과들을 일구어냈기 때문이다. 이밖에 법가의 사상가는 자료상의 제약으로 인해 한비자만을 다루고 다른 사상가들은 거의 언급하지 못하였다.

공화정이냐 제왕정이냐, 민주주의냐 사회주의냐, 이런 것들만이 정치학의 전부는 아니다. 이 책은 도가, 유가, 법가의 정치사상을 치본론과 치도론, 치술론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 있다. 치본론은 통치의 본질에 관한 논의라 할 수 있고, 치도론과 치술론은 각각 통치목적론과 통치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세 가지 기준 속에서 저자는 전통사상에 대한 정치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저자의 시도 가운데 특징적인 면을 든다면 무엇보다도 이것이 정치학적 해석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공자의 적통을 맹자가 아닌 순자에게로 연결시키고, 노자의 사상은 장자에 이르러 결정적으로 왜곡되었다고 단정한다. 또한 관중과 한비자를 전통사상의 핵심 영역 속에 편입시키고 있다. 이러한 해석들이 가능한 것은 그것이 모두 철학적 접근이 아닌 정치학적 접근이기 때문이다.



신동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정치학)를 취득하였다. 조선일보, 한겨레신문 기자를 거쳐 일본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의 객원연구원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대표 저술로는 『통치보감』,『관중과 제환공』,『치도와 망도』,『역사대장정』,『난세를 평정하는 중국 통치학』등이 있다.

춘추전국 묵가/병가/법가사상과 PR철학

춘추전국 묵가/병가/법가사상과 PR철학박기철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논문
관리자  |  admin@the-p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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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0.11.23  21: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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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500여년 전 중국은 춘추 시대다. 춘추시대 이후 진나라의 중국 통일 이전까지 전국시대가 이어진다. 과도기적 춘추전국이라는 역사에서 제자백가라 일컬어지는 사상들이 생겨나게 됐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상들 중 공중관계 활동인 PR과 가장 관련이 깊은 사상은 원시유교사상과 원시도교사상이다. 그 당시 인도에서 생긴 원시불교사상도 PR철학과 관련이 깊다. 아울러 춘추전국시대 묵가, 병가, 법가 사상도 PR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지난달 19일 한국PR학회가 주최한 추계 정기학술대회에서 박기철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가 발표한 ‘춘추전국시대 묵가·병가·법가 사상과 PR철학’이 그같은 내용을 담아 눈길을 끌었다. 박 교수의 논문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편집자 주>

■ PR에 의미를 주는 원시 동양사상
논어 속 공자님 말씀을 살펴 보면 원시 유교 사상은 순리적이며, 인간적이고, 현실에 충실한 사상이었다. 그러한 원시 유교 사상에 맞게 현대 PR은 유연·관계·가치의 철학을 가진다. 이제 현대 PR은 이윤 추구를 위한 마케팅 PR(MPR)을 넘어 가치 추구의 브랜딩 PR(BPR)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또한 조직과 공중의 관계를 넘어 조직과 생태와의 관계를 배려하면서 공동체 내의 조직과 공중이라는 공동체 PR의 철학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현대 PR은 공자님 말씀이었던 순리적 인간적 충실한 모습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할 때이다. 그래서 순리적 유연성, 인간적 관계성, 충실한 가치에 따른 현대 PR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노자 도덕경에 실린 도의 철학 역시 주술과 거리가 먼 패러다임 전환의 커다란 철학이다. 노자 사상의 관점에서 PR이란 이기기보다 감싸는 여성성의 페미니즘 PR이며, 공중으로부터 이윤을 얻기보다 공중에게 가치를 베푸는 PR이며, 차이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PR이며, 조직과 공중 간의 관계만이 아닌 생태적 공동체를 실현하려는 PR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PR이란 조직과 공중 간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넘는 그물망 커뮤니케이션으로 하나의 생태적 공동체 안에서 조직과 공중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조직이 공중에게 가치를 주며 서로를 감싸는 관계 활동이다.
불교의 초기 경전인 아함경에서 알 수 있는 원시 불교사상을 살피면 불교는 연기(緣起)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매우 현실적인 세계관의 철학이다. 이러한 원시불교 철학의 관점에서 PR은 공중관계 PR만이 아닌 생태관계 PR로서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공중관계 PR은 조직이 중심에서 환경을 이루는 다양한 공중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 공중관계 PR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것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다. 하지만 생태관계 PR에서 조직은 중심에 있지 않고 생태계 안의 인간이 그렇듯 그물망 속의 한 점에 불과하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그물망 커뮤니케이션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은 연기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원시 불교 사상과 생태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현대 PR 철학이 만나는 전환점에서 PR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면, “PR은 호의적 공중 관계를 맺기 위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다”라기보다 “PR은 지속적 생태 관계를 맺어가는 그물망 커뮤니케이션”이다.
■ 원시 묵가 사상과 PR 철학
원시유교사상, 원시도교사상과 마찬가지로 약 2,500여년 전에 생긴 원시묵가사상의 핵심을 세 가지 한자로 압축요약한다면 실(實), 겸(兼), 천(天)이다. 
● 실(實)의 사상 : 묵가사상의 기반은 실용주의, 또는 현실주의 철학이다. 그 사상의 가장 근본적인 요체는 바로 뜬 구름 잡는 이상을 배격하는 실의 사상에 있다. 묵자의 문헌에서 이러한 실의 사상을 가장 실감나게 잘 알 수 있는 부분은 절용(節用)편이다. 절용이란 비용의 절감을 뜻한다. 
● 겸(兼)의 사상 : 겸(兼)이란 더불어·함께의 뜻을 가지고 있다. 겸애(兼愛)란 더불어 사랑한다는 뜻이다. 더불어 사랑하는 것은 자기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같이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은 바로 자기만 사랑하는데서 생긴다. 남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는 무지한데서 생긴다. 그렇게 자기만 사랑하고 남에 대해서는 아무 상관없이 무심한 것은 하나의 병이다. 싸이코패스라는 정신질환은 그러한 병의 결정판이다.
● 천(天)의 사상 : 여기서 하늘이란 천주교와 같이 신앙적인 대상이 아니라 철학적인 표상이다. 즉 하늘의 뜻에 따라 일을 추진하고 일이 성사되어야 현실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묵자 전편에 흐르는 이러한 하늘 중심의 사상은 천지(天志)편에 가장 직접적으로 나와 있다. 천지란 말 그대로 하늘의 뜻이다. 하늘의 뜻을 좇아 따르는 사람을 천자라 한다. 천자는 하늘의 뜻에 따라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한 하늘의 뜻은 강하고 큰 나라가 약하고 작은 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머리가 좋고 높은 사람이 아랫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다.
■ 원시 병가 사상과 PR 철학
손자병법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를 말하라고 하면 대개 ‘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고 하는데, 손자병법에는 이런 말이 없다. 손자는 이렇게 욕심스럽게 말하지 않고 다만 ‘知彼知己 白戰不殆’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손자는 전쟁을 미학(art of war)으로 끌어 올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쟁미학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즉 이기기 위한 전쟁의 기술을 제시한 사람이 아니라 이기게 되는 전쟁의 철학을 제시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손자병법을 다룬 해설서(권형안 2006, 유동환b 2005, 노태준 2009)에서 가장 감명깊은 구절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일 것이다. 
“是故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이런 고로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은 최선 중의 최선이 아니다. 전쟁하지 않고 적병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 중의 최선이다.)
경쟁자보다 한 수 위에 있어야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 공중관계 활동인 PR도 마찬가지다. 공중과 좋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려면 경쟁자보다 한 수 위에서 고객에게 좋은 가치를 지속적으로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시시하게 쩨쩨하게 경쟁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승리하게 된다. 승리 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승리라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경쟁을 넘는 경쟁미학이다. 또한 마케팅의 미학이며, PR의 미학이기도 하다.
■ 원시 법가 사상과 PR 철학
법가 사상이란 순자처럼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보기 때문에 인치나 덕치가 아니라 철저한 법치에 의해 강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비자의 법치주의 사상 안에는 노자사상이 짙게 깔려 있다. 가령 노자도덕경 63장에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이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것에서 시작되고, 천하의 큰 일은 반드시 작은 것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한비자는 이러한 문구를 비유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千丈之堤, 以?蟻之穴潰 百尺之室 以突隙之烟焚 즉 천길의 강둑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지고 백척의 큰집도 굴뚝연기로 불탄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매사에 세심하고 치밀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법가 사상은 PR의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인지의 문제와 관련시킬 수 있다. 지금까지 원시유교나 원시도교, 원시불교 사상은 개념적으로 PR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에 도움은 되나, 그렇다면 PR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답을 주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한비자의 법가 사상에 대해 나라를 움직이는 방법적 시스템이라고 할 때, 이러한 해석을 PR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PR이 제대로 되려면 널리 알리는 홍보 시스템이 아니라 다양한 공중관계 시스템을 순리적으로 갖추는 일이 PR의 도(道)이고, 또한 PR의 법(法)이다. 다양한 공중관계 시스템이란 공중별 PR을 위한 시스템이다. 내부 직원이라는 공중과의 관계, 협력업체라는 공중과의 관계, 소비자라는 공중과의 관계, 투자자라는 공중과의 관계, 지역사회 주민이라는 공중과의 관계, 정부 공무원이라는 공중과의 관계, 네티즌이라는 공중과의 관계, 언론사 기자라는 공중과의 관계 등… 이러한 다양한 공중들과 지속적으로 호의적 관계를 이루어 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PR을 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된다. 
결론적으로 사변화 이전의 원시 유교사상은 유연한 인간관계, 주술화 이전의 원시 도교사상은 물처럼 흐르는 순리, 신앙화 이전의 원시 불교사상은 세상만사 얽히고 설킨 연기의 철학이었다. 묵가 사상은 안을 채우는 충실, 병가 사상은 이기게 되는 결과, 법가 사상은 실제로 구현하는 방법의 철학이었다. 이러한 여섯 가지 동양사상의 키워드를 사용해 PR에 대해 종합적으로 정의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PR은 그물망 안에서 서로 緣起 되어진 공중들과 지속적 關係를 順理에 따라 이루어 가기 위해 먼저 속을 充實히 한 후 다양한 공중들과의 관계 方法을 마련하여 경쟁에서도 이기게 되는 結果를 가져오는 활동이다.”
■ PR 철학의 패러다임 전환
원시 유교사상 등 동양사상들은 PR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과 방법을 일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PR에 대한 지침을 열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널리 홍보하기보다 가까운 관계부터 맺어 가라.PR은 홍보와 전혀 다르다. 널리 알리는 홍보는 단지 노출을 많이 하도록 해 전달을 잘 하면 되지만, 공중관계인 PR은 더 복합적이며 입체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 PR이 잘 되려면 멀리 있는 공중보다 가장 가까운 내부직원, 협력업체 등의 공중부터 좋은 관계를 맺어 가야 한다. PR은 외부로 알리는 활동이라기보다 내부에서부터 먼저 공감이 가도록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는 활동이다.
2. 허상적 이미지를 꾸미기보다 실체적 밸류를 가꿔라.
PR에 대한 가장 커다란 오해는 이미지를 좋게 포장하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이미지란 실제와 상관없이 만들어질 수 있는 허상이기 쉽다. PR은 이미지를 겉으로 좋게 해 멋지게 꾸미며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안으로부터 내부의 가치를 충실히 가꾸어 가는 것이다. 이미지 메이킹이 아니라 밸류 빌딩인 셈이다. 이는 실속을 중시하는 묵가 사상과 같은 맥락이다. PR의 키워드는 이미지가 아닌 밸류이다.
3. 입소문을 내려 하지 말고 입소문이 나도록 하라.헛소문과 입소문은 다르다. 헛소문(rumor)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헛되게 퍼지는 것이라면 입소문(mouth to mouth)은 실제로 써 본 사람의 입을 통해 다른 사람의 귀로 들어가 차례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소문이란 인위적으로 내려고 해서 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나게 되는 것이다. 입소문이 나는 것은 실제로 써 본 사람이 좋은 가치를 통해 좋은 체험을 하고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을 때이다.
4. 쌍방향 공중관계보다 그물망 생태관계를 배려하라.
정통적인 PR의 관점에서 조직과 공중 간의 쌍방향 균형은 가장 이상적인 상태이다. 하지만 쌍방향 균형은 단지 조직과 공중 간의 관계일 뿐이다. 불교의 연기사상을 수용했을 때 PR은 더욱 포괄적이며 전반적인 관점을 취하게 된다. 조직과 공중은 모두 관계망인 그물망에 걸쳐 있는 하나의 점일 뿐이다. 그물망에 속해 있는 모든 점들은 고정된 하나의 중심 없이 모두 얽히고 설켜 있는 관계에 있다.
5. 튀는 독창성보다 끌리는 진정성을 가져라.독창성은 다른 것들과 차별화 되는 것이다. 차별화 되면 남들보다 튀게 된다. 광고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크리에이티브이다. 하지만 광고에서건 광고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PR에서건 독창성(creativity)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진정성(authenticity)이다. 즉 진심이 느껴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정성이 있으면 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끌리게 된다. 진정성 없는 독창성은 사기에 불과하다.
6. 이기려는 목적이 아니라 이기게 되는 결과를 얻어라. PR은 승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맺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PR은 싸움(戰)에서 이기기 위한 꾀(略)인 전략이라는 말과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PR이 추구하는 것은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기게 되는 것이다. 이는 손자가 전쟁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레드오션이 아닌 블루오션에서도 결국 싸움의 경쟁에서 벗어나면 결과적으로 이기게 된다.
7. 이윤을 얻는 MPR보다 가치를 주는 BPR을 하라.기존의 CPR(Corporate PR)이 머릿속의 호의를 얻는 것이라면, 1991년에 새롭게 생긴 MPR(Marketing PR)은 마케팅 상의 실제적 이윤 얻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MPR은 기업의 목표에 부합되므로 보편적인 용어가 되었다. 하지만 PR은 이윤을 얻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가치를 주기 위한 활동이다. 여기서 가치란 브랜드를 뜻한다. 그래서 BPR(Branding PR)은 가치를 주는 PR이다. 
8. 거창한 뉴스꺼리보다 생생한 이야기꺼리를 찾아라.널리 알리는 홍보를 위해 언론홍보가 중요하다. 그래서 보도자료를 기자에게 제공하는 PR(Press Release)를 통해 대중매체에 공표(publicity)될 수 있다. 이를 위해 거창한 뉴스거리의 보도자료를 기자에게 주려고 한다. 하지만 기자의 입장에서 그런 뉴스거리는 별 뉴스가치가 없을 수 있다. 대신에 의미있고 흥미있는 생생한 이야기꺼리가 담긴 보도자료는 끌리게 되어 보다 비중있는 기사로 다루어지기 쉽다.
9. 집중적 정보전달보다 지속적 상호작용에 힘써라.커뮤니케이션이란 쌍방적 의사소통을 뜻하는데, 일방적 의사전달로 이해하기 쉽다. 집중적으로 우리의 정보나 의사를 전달하면 커뮤니케이션이 잘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집중성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그것도 단지 일시적인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호작용이 중요하다. PR이 추구하는 관계는 그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10. 다양한 공중관계 시스템을 실제로 갖춰라.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는 PR 마인드와 철학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이것이 구현되려면 다양한 공중들과의 관계 시스템이 방법적으로 마련돼야 한다. 법가 사상이 치밀하며 세심한 시스템으로 나라를 운영해야 하는 방법과 같은 맥락이다. PR은 복잡하며 입체적이고 전반적인 영역이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넓고 깊이 생각한 후에 마인드(Philosophy) 기반의 관계 시스템(method)이 작동되어야 한다.

대여대취- 크게 주고 크게 얻어라, 신동준

대여대취 크게 주고 크게 얻어라


신동준 지음 | 21세기북스 | 2012년 07월 20일 출간

책소개

손자를 벼린 조조의 성공 지략으로 나만의 ‘대물’을 꿈꿔라!

크게 주고 크게 얻어라『대여대취』. 고전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과 사람의 길을 찾는 고전 연구가이자 역사문화 평론가인 저자 신동준이 조조의《손자약해》를 바탕으로 대여대취 정신을 ‘지금 당장’의 현리 가치로 쉽게 풀어냈다. 저자는 삼국시대 당시 천하통일 기반을 닦은 조조는 도가와 법가 사상에 입각해《손자병법》을 새롭게 편제하고 주석을 가했던 바, 《손자병법》은 반드시 조조 시각에서 접근해야 그 취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조조의 지혜가 담긴《손자병법》으로, 임기응변으로 주도권을 쥐는 방법부터 적과 나의 실력을 알고 싸우는 법, 지략이 뛰어난 자를 활용하는 법 등 ‘크게 주고 크게 얻는’ 비결들을 알려준다.

북소믈리에 한마디!

이 책은 제왕을 위시해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손자병법》의 내용을 조조의 시각으로 새롭게 재구성하여 담아낸 책이다. 다양한 전략과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이 비즈니스의 아이디어를 얻고, 사람을 깊이 읽는 안목을 얻고, 치국평천하의 방략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한다.

저자소개

저자 : 신동준

신동준저자 신동준은 학오學吾 신동준申東埈은 고전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과 사람의 길을 찾는 고전연구가이자 역사문화 평론가다.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안목을 바탕으로 이를 현대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의 저서는 독자들에게 고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경기고등학교 재학시절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의 대가인 청명 임창순 선생 밑에서 사서삼경과 『춘추좌전』, 『조선왕조실록』 등의 고전을 배웠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조선일보》와 《한겨레》 등에서 10여 년 간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다. 1994년에 다시 모교 박사과정에 들어가 동양정치사상을 전공했고, 이후 일본의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을 거쳐 『춘추전국시대 정치사상 비교연구』로 모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21세기정경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그는 서울대학교·고려대학교·한국외국어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에게 동양 3국의 역사문화와 정치사상 등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월간조선》, 《주간동아》, 《주간경향》, 《이코노믹리뷰》 등 다양한 매체에 꾸준히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2012년부터는 《조선일보》 주말판 경제섹션 〈위클리비즈〉의 인기 칼럼 ‘동양학 산책’을 연재 중이다. 저서로는 『후흑학』, 『사마천의 부자경제학』, 『조조 사람혁명』, 『팍스 시니카』, 『열국지 교양강의』, 『조선국왕 vs 중국황제』, 『인물로 읽는 중국 현대사』, 『삼국지, 군웅과 치도를 논하다』, 『춘추전국의 영웅들』(전3권), 『CEO의 삼국지』,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연산군을 위한 변명』, 역서 및 편저로는 『자치통감 삼국지』(전2권), 『춘추좌전』(전3권),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초한지』 등이 있다.

목차

서문 ­ 대여대취, 크게 주고 크게 얻어라 005
서설 ­ 조조의 『손자약해』 014

제1장 인리제권因利制權 임기응변으로 주도권을 쥐어라 [대계大計]
국가 존망을 생각하라 · 025 | 전쟁 이치를 파악하라 · 027 | 천지운행을 이해하라 · 029 | 냉철히 비교 분석하라 · 032 | 적의 예상을 깨라 · 036 | 이길 조건을 갖춰라 · 040

제2장 병귀신속兵貴神速 패할 때도 속전속결로 끝내라 [작전作戰]
비용을 생각하라 · 047 | 오래 끌지 말라 · 051 | 현지서 조달하라 · 059 | 민폐를 줄여라 · 062 | 내 것으로 만들라 · 065 | 속전속결을 행하라 · 069

제3장 지피지기知彼知己 적과 나의 실력을 알고 싸워라 [모공謀攻]
싸우지 말고 이겨라 · 075 | 유혈전을 피하라 · 086 | 유연하게 생각하라 · 089 | 양장을 선발하라 · 093 | 맡겼으면 믿어라 · 095 | 자신부터 돌아보라 · 101

제4장 가승재적可勝在敵 승리는 적에게 달려 있다 [군형軍形]
공격처럼 수비하라 · 109 | 패하지 않는 싸움을 하라 · 112 | 내부를 바르게 하라 · 116 | 인재를 길러라 · 119

제5장 기정상생奇正相生 기병과 정병을 뒤섞어 운용하라 [병세兵勢]
기병을 활용하라 · 125 | 절도를 갖춰라 · 133 | 미끼로 유인하라 · 139 | 전세를 장악하라 · 142

제6장 피실격허避實擊虛 실한 곳을 피하고 허한 곳을 쳐라 [허실虛實]
고정된 상식을 깨라 · 149 | 재빨리 치고 빠져라 · 152 | 힘을 집중시켜라 · 156 | 자취를 감춰라 · 161

제7장 병이사립兵以詐立 용병은 적을 속이는데서 시작한다 [군쟁軍爭]
돌아가듯 직진하라 · 173 | 능력껏 짐을 져라 · 177 | 유리할 때 움직여라 · 182 | 상대를 흔들어라 · 186 | 퇴로를 열어 주어라 · 191

제8장 필사가살必死可殺 죽기로 싸울 것을 고집하면 패한다 [구변九變]
현장에서 대처하라 · 201 | 군명을 거부하라 · 209 | 유사시를 대비하라 · 218 | 자신을 경계하라 · 223

제9장 병비익다兵非益多 병력이 많다고 꼭 좋은 게 아니다 [행군行軍]
알고 움직여라 · 235 | 발밑을 조심하라 · 238 | 조짐을 읽어라 · 244 | 문무를 겸전하라 · 252

제10장 지천지지知天知地 천시와 지리까지 읽어야 이긴다 [지형地形]
현지 전술을 구사하라 · 265 | 내부부터 단속하라 · 272 | 백성을 보호하라 · 277 | 자식처럼 아껴라 · 281

제11장 오월동주吳越同舟 필요하면 적과 함께 배에 올라라 [구지九地]
상황에 적응하라 · 289 | 불리하면 중지하라 · 299 | 사지로 내던져라 · 303 | 오월동주를 행하라 · 308 | 필승을 기하라 · 312 | 천하를 품어라 · 319 | 임무만 알려라 · 325

제12장 비리부동非利不動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마라 [화공火攻]
도구부터 준비하라 · 335 | 바람을 따르라 · 342 | 감정을 자제하라 · 350

제13장 이지위간以智爲間 지략이 뛰어난 자를 활용하라 [용간用間]
정보망을 갖춰라 · 361 | 보안에 주의하라 · 367 | 인재를 활용하라 · 374

후기 21세기 승부는 손자병법 손에 있다! 380
참고문헌 391

책 속으로

『손자병법』에 나오는 모든 전략 전술은 기본적으로 부득이용병 또는 집이시동에 입각한다. 평시에는 무기를 거두었다가 전시에 무기를 들고 대응하라고 주문한다. 그렇다면 「시계」에서 부득이용병의 구체적인 방안으로 거론하는 도道, 천天, 지地, 장將, 법法은 과연 무엇을 뜻할까? 우선 「시계」에서 말하는 ‘도’는 『도덕경』에서 역설하듯이 ‘덕德’의 본원을 뜻한다. 덕을 두고 노자는 무위지치無爲之治, 장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 공자는 인仁, 묵자와 맹자는 의義, 순자는 예禮, 한비자는 법法, 손무는 무武라 했다. 이처럼 제자백가 모두 덕을 언급하지만, 모두가 최상으로 여겼던 것은 무위지치다. 무위지치는 제왕의 통치가 마치 해와 달이 만물을 고루 비추듯이 지극히 공평무사함을 뜻한다. (28쪽)

삼국시대 초기 신흥 강자 조조와 당대 최고의 무력을 자랑한 원소의 운명이 갈리게 된 결정적인 배경은 조조가 천자를 옆에 끼고 천하를 호령하는 이른바 ‘협천자挾天子, 영제후令諸侯’를 실행한 데 있다. 명분상의 우위를 점한 것이 요체다. 원소는 힘만 믿고 이를 무시했다. 대개 원소의 자만심이 지나쳤다고 해석하나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원소 스스로 천자가 되고자 욕심을 낸 것이 정답이다. 이미 민심이 한나라를 떠난 만큼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자 한 것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릇이다. 원소는 그릇이 작았다. 게다가 시기심과 욕심도 많았다. 난세에 천하를 거머쥐려는 자로서는 실격이다. (90쪽)

조조의 인재 등용은 공적인 대의에 입각한 구현求賢, 유비의 용인술은 사사로운 의리에 기초한 인현引賢으로 표현할 수 있다. 손권은 시의時宜를 좇은 용현用賢에 해당한다. 그의 용현은 일정한 선을 넘지 않았다. 그 비결은 손권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잘 나타난다. “상대의 장점을 높이고 상대의 단점을 곧 잊어버린다.” 그는 상대의 단점에 눈을 감아버리고 장점을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한번 일을 맡긴 뒤에는 전폭적인 신임을 아끼지 않았다. 적벽대전에서 주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이릉대전에서 육손을 탁용한 데 이어 제갈근에게 끝없는 믿음을 보낸 것이 그 증거다. (114­115쪽)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문’과 ‘무’를 고루 갖춰 명실상부한 ‘문무겸전’의 자세로 새 왕조를 개창한 인물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창업주인 위무제 조조다. 그는 동탁토벌을 기치로 내걸고 군벌 경쟁에 뛰어든 이래 죽을 때까지 전장에서 평생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목할 것은 당시 유비와 손권을 포함한 여러 군웅 가운데 조조처럼 전장에서조차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인물이 전무했다는 점이다. 조조의 행보 가운데 문무겸전의 병도 이치를 가장 잘 보여 준 사례로 ‘분소밀신焚燒密信’ 일화를 들 수 있다. 이 일화는 조조가 원소를 격파한 관도대전 승리 이후에 나온 것이다. (253­254쪽)

“옛날 용병을 잘하는 사람은 아군에게 유리하면 곧바로 공격하고 불리하면 곧바로 중지했다”는 대목 가운데 중요한 것은 불리할 때 중지하는 일이다. 유리할 때 공격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웬만한 장수라면 능히 할 수 있다. 그러나 불리할 때 중지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대 판단하기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그런 판단을 내렸을지라도 이미 투자한 것이 많은 까닭에 선뜻 발을 빼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리더십의 진면목은 바로 이때 나온다. 이를 잘한 인물로 삼국시대의 조조를 들 수 있다. (300쪽) 닫기

출판사 서평

손자병법, 세상을 크게 바라보는 안목을 담다

천하를 사로잡은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모두 『손자병법』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손정의는 『손자병법』을 자신의 경영 전략과 접목시킨 ‘자승병법自乘兵法’을 만들어 일본 최고의 부자가 됐다. 세계 최고의 부자 빌 게이츠도 오늘의 자신이 있는 것은 『손자병법』 덕분이라고 했다. 스티브 잡스가 ‘창조 경영’과 소프트웨어의 상징 애플제국을 건설하고, 빌 게이츠가 윈도우 개발로 천하의 부를 거머쥐고, 손정의가 일본 최대의 컴퓨터 회사를 창립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고금을 관통하는 『손자병법』의 위대한 면모를 웅변하는 대목이다.
고금의 역사를 개관하면 알 수 있듯이 무력을 동원하기 전에 명예와 이익, 권력을 좋아하는 인간의 기본 심성을 적극 활용해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 고수의 비결이다. 『손자병법』은 바로 이런 이치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손자병법』은 병가 사상의 정수를 응축한 최고의 고전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손자병법』을 세상을 크게 바라보는 안목과 지혜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고전으로 간주했다.
수천 년에 걸쳐 많은 병서가 명멸했지만 유일하게 『손자병법』만 제왕을 위시해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이 읽으면 글로벌 비즈니스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고, 두목 같은 문인이 읽으면 사람을 깊이 읽는 안목을 얻을 수 있으며, 조조 같은 위정자가 읽으면 치국평천하의 방략을 찾을 수 있다.

대여대취, 크게 주고 크게 얻어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적확한 탐구가 빛나는 최고의 지략서 『손자병법』의 핵심은 ‘대여대취’다. 크게 주고 크게 얻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익을 향해 무한 질주하는 인간의 본성 ‘호리지성好利之性’을 정밀하게 추적함으로써 얻어낸 것이다. 그 호리지성, 대여대취의 뜻을 『손자병법』의 뚜렷한 맥으로 관통시킨 인물이 바로 조조다.
이 책은 조조의 『손자약해』를 바탕으로 대여대취 정신을 ‘지금 당장’의 현실 가치로 풀어쓴 것이다. 삼국시대 당시 천하통일 기반을 닦은 조조는 도가와 법가 사상에 입각해 『손자병법』을 새롭게 편제하고 주석을 가했던바, 『손자병법』은 반드시 조조 시각에서 접근해야 그 취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시중에는 『한비자』의 「외저설 좌상」에 나오듯 겉의 화려한 장식에 현혹되어 정작 알맹이를 놓치는 매독환주買?還珠의 우를 범하는 책들이 넘쳐난다. 조조가 역설한 집이시동 이치를 무시하거나 간과한 결과다. 여기에서 집이시동은 평소 무기를 거두어들였다가 부득이할 때 사용한다는 뜻이다. 집이시동은 『손자병법』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 이념에 해당한다.
대여대취는 곧 커다란 미끼로 상대방을 유인해 제압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본성을 최대한 활용해야 궁극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의미다. 『손자병법』이 「모공」에서 백전백승은 결코 최상의 계책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로 『손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진 손무와 이를 새롭게 편제한 조조, 무위지치를 역설한 노자, 무위자연을 내세운 장자, 공평무사한 법치를 역설한 한비자 모두 대여대취의 취지에 공명했다.

손자병법, 난세의 제왕학

『손자병법』이 『한비자』와 더불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난세의 제왕학’으로 군림하는 것은 극히 현실적인 입장에서 난세의 종식 방략을 제시한 덕분이다. 진시황이 병가와 법가 사상에 입각해 사상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조조가 당대 최고의 병법가이자 법가 사상가로 행보하며 삼국시대를 마무리 짓는 기틀을 닦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조가 『손자병법』을 새롭게 펴낸 『손자약해』 서문에서 『도덕경』의 제도帝道 이념을 병도 이념으로 끌어들인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조조가 “영웅은 가슴에는 큰 뜻을 품고, 뱃속에는 좋은 계책이 있어야 한다”고 일갈한 것처럼 ‘뜻’과 ‘꿈’을 크게 갖고 대성하고 싶다면 반드시 이 책을 접해야 할 것이다. 백날의 작은 승리는 별것 아니며 매사가 그렇듯 큰 이익을 미끼로 내걸어야만 큰 고기를 낚을 수 있다. 조조의 지혜가 살아 꿈틀대는 『손자병법』으로 ‘크게 주고 크게 얻는’ 그 최강 비결을 배워라.

2014년 10월 8일 수요일

도올과 베버의 대화

도올과 베버의 대화 
http://www.yesu.kimc.net/33dolbe.htm
 ▣ 목차
 1. 머리말
 2. 도올과 베버의 프로필
 3. 베버의 사회과학적 방법론
 4. 금욕주의의 신앙적근원
 5.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
 6. 도올의 베버 비판
 7. 맺 음 말
 ● 부 록 1 [도올 논어(2)]
 ◇ 요절 : ① 성경: "네가 자기 사업(직업 또는 사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
               ② 論語: "자왈 '군자불기'(子曰 '君子不器')"
 ▣ 본문
 1. 머리말
 KBS TV1 의 '도올의 논어 이야기' 제42강(2001년 3월 2일, 23:30~24:30)에서 도올의 베버비판을 흥미 있게 시청하고, 그 강의 내용을, 도올 강의를 시청하는 시청자들과 또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분들을 위하여, 좀더 부연(敷演)하고자 하여 동서양의 대표적 두 석학(碩學)의 지상대화(紙上對話,Cyber dialogue)의 장(場)을 마련했다. 이것은 작은 세기적인 대화(世紀的인 對話)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화의 논점(Point)은 서구 근대의 직업관(Beruf, Professional specialist)과 유교권의 직업[기(器), a tool, 동양적인 전문직]사상이 근대의 동서양의 경제사회에 각기 끼친 문화와 시스템(System)의 차이를 비교한 막스 베버(Max weber)의 비판을, 도올이 공자(孔子)편에서 비판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국외자(Spectator)로서 코멘트(Comment)하는 형식으로 쟁점별로 지상대화를 전개시킨다.  대화의 텍스트(Text)는, '도올논어(2)' (김용옥저서, 서울, 통나무, 2001.2.1)와 '프로테스탄티즘의 倫理와 資本主義의 精神'(막스 베버저서, 강명규의역, 서울, 一潮閣, 1985.3.10)이다.(단, 이 글은 본문에서는 각기'도올논어(2)'와 '베버의 저서'로 약칭한다.)
 2. 도올과 베버의 프로필(Profile)
 도올(김용옥교수)은 한국 천안 태생(서기 2001년 현대 50대 초반)으로 고려대학교, 국립대만대학, 일본동경대학, 미국하바드대학에서 중국 철학을 전공하고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세계적인 중국 철학자의 한 분이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독일 엘프르트시 태생으로 하이델 베르크대학에서 법률학, 역사학, 경제학, 사회학, 철학등을 수업(修業)한 후, 그의 풍부한 세계사적 지식을 배경으로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철학등을 포괄적으로 이해.발전시킨 위대한 서구의 사회과학자였다. 그의 핵심적인 업적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사회과학 방법론의 확립이며, 그 둘은 그의 사회과학 방법론에 의한 근대 자본주의의 해석이다. 그의 대표적 역작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Die Protestantishe Ethik Und Geist des Kapitalismus, zuerst 1904-1905)이다
 3. 베버(Max Weber)의 사회과학적 방법론
 (1) 베버의 방법론
 베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버의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베버의 방법론은 이념형(理念型,Ideal Typus)과 가치 중립성(價値 中立性,Wertfreheit)이다. 현실의 인과관계를 설명할 경우 인과성의 필연성이나 법칙이 아니라 달리도 일어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일어 났다는 개연성(Probability), 또는 확율성으로 설명한다. 즉 베버는 어떤 역사적 현상의 결과는 무수히 많은 원인들이 모두 일정한 역할을 가지고 참여함으로써 나타난 것이므로 한 가지 요인에 의한 필연적 결과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경제적인 요인만을 중시하는 맑스(K. Marx, 1818-1883)의 방법론과 역사학파의 개념들(역사법칙 및 민족정신등)을 배격하였다.  따라서 그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윤리라는 이념형(理念型)은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을 상징하기 위한 수단일 뿐 자본주의 자체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은 아니었다. 베버의 개념은 인식자(認識者)의 사유과정(思惟過程)에서 얻어지는 것이므로 현실 속에서 순수하게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은 여러 이념형들의 혼합체로 나타나므로, 특수한 개별적 특징 모두를 설명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학파등의 평균(平均槪念)이 제외시킨 비 평균적인 요소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 도올의 베버 방법인식
 (가) 도올의 텍스트
 (ㄱ) 자료 1 : "자아! 이 정도되었으면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로 인하여 동양사상이 얻어먹어야 했던 '베버의 욕지거리'를 독자들은 실컷 얻어 먹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도올논어(2), P149]
 (ㄴ) 자료 2 : "그러나 우선 그가 케피탈리즘의 발생연원의 정신사적 필연성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운운하는 것은, 결과적 사태에 대한 기술은 될 수 있을 지언정, 인과론적인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 안할 수도 있는 것이며, 유교의 현세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적 성향을 캐피탈리즘의 발생으로 유도시키는 해석의 행태에는 그 사상자체 이외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사적 우발요인이 관여되어 있는 것이다. 캐피탈리즘의 불발생의 원인을 유교에다 물을 수 없다...." [도올논어(2), P150상단)
 (나) 도올 이해에 대한 코멘트
 첫째, 자료1에서 '베버의 욕지거리'란 말은 속어적 표현으로 적당하지 않지만, 더 중요한 요점은 도올이 베버의 가치 중립적 즉 몰가치적(沒價値的)방법론을 간과한 말을 하고 있다.
 둘째, 자료2에서는 세 가지 오류점이 발견된다. 그 하나는, 베버의 방법론이 이념형(Ideal Typus)이라는 것을 지각했다면  "...인과론적인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표현이 나올 수 없다.  그 둘은,  "...그러한 사상적 성향을 캐피탈리즘의 발생으로 유도시키는 해석의 행태에는 ..."  구절에서도 베버의 이념형과 가치중립적인 방법론을 간과하고 있다.
 그 셋은, "...캐피탈리즘의 발생으로 유도시키는 해석의 행태에는 그 사상자체 이외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사적 우발요인이 관여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이 구문에서는, 도올은 베버의 "현실은 여러 이념형들의 혼합체로 나타나므로 평균개념이 제외시킨 비 평균적인 요소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베버의 이념형과 의견이 일치 하기도 하여 베버 방법론에 대한 이해의 일관성에 혼란을 준다.
 4. 금욕주의(禁慾主義)의 신앙적 근원
 (1) 도올의 텍스트
 ●자료 3 : "퓨리탄의 금욕주의가 가귀(可貴)한 것이라면, 유교의 금욕주의 또한 그 이상의 진실한 내면을 포용하는 것이다."[도올논어(2), P150하단)
 (2)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금욕윤리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윤리는 '인간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것이고, 소유자는 다만 하나님의 관리자(magisrates of officers of God)일뿐이다.'라는 기독교의 교리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을 인간의 향락을 위하여 낭비하는 것은 올바른 행위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한 기독교인들은, 성실한 직업생활(잠22:29)로 저축한 재산을 건전한 사업에 투자하여 합법적 이윤을 추구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선용(善用)해야 할 금욕적 소유인들이다.(참고; 마25:14-30)
 (3) 유교의 금욕윤리
 도올은, "유교의 금욕주의 또한 그 이상의 진실한 내면을 포함하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교의 내면적 금욕윤리의 실체(철학)가 무엇인가? 알고 싶다.
 우리가 알기엔 퓨리탄의 금욕윤리 이상의 진실한 내면적 금욕주의를 들은 적이 없다. 다시말하면 합리적인 절약심이나, 천민자본주의 정신인 '영리욕'(營利慾)이상의 신앙적인(참고; 마6:19-21) 금욕윤리가 유교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5.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
 (1) 도올의 텍스트
 ●자료 4 : 도올은,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금욕주의에서 캐피탈리즘(Capitalism)이 발생 안할 수도 있는 것이며, 유교의 현세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도올논어(2), P150]
 (2) 자본주의(Capitalism)의 개념
 (가) 자본주의의 두 개념
 막스베버는 두 가지 자본주의를 말했는데, 그 하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경제활동의 동기인 영리욕(營利慾)만에 의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Pariakapitalismus)라고 하고, 프로테스탄티즘(특히 Calvinism)의 금욕윤리에 의하여 규제되는 규범적 이윤추구의 자본주의를 근대적 자본주의 또는 윤리적 자본주의라고 정의했다.
 (나) 근대 자본주의의 인프라(INFRA)
 근대 자본주의 성립의 두 가지 초석은 자본의 축적과 상품노동의 제공이었다.  이것은 주로 프로테스탄트들의 소명의식적인 전문직업인(Professional Specialization)이 제공한 상품노동과 그들의 금욕적 절약에 의한 산업자본의 축적(accumulation)이었다고 한다.
 (ㄱ) 자본(투자자원)
 프로테스탄트들의 금욕적 절약에 의한 투자에 대하여 베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료 5 : 전형적인 청교도들은 많이 벌고 적게 썼다. 그리고 그의 소득을, 절약하고자 하는 금욕주의적 열정으로부터, 매우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사업에 자본으로서 재투자하였다.[The typical Puritan earned plenty, spent little, and reinvested his income as capital in rational capitalist enterprise out of an asceticist compulsion to save.(RC, p.247)]
 (ㄴ) 상품노동의 제공
 근대 자본주의는 자본과 함께 인간노동의 상품화가 동반된 시스템이었다. 즉 근대의 자본주의는 자본을 갖지 못한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력(생산수단)을 팔아서 살아가는 임금노동자가 필요하다. 이 노동자들이 일정한 영역의 노동행위를 전문적으로 반복할 때 근대적인 의미의 직업(Professional, Beruf, Vocation)이 되었고, 또 사회적 지위도 되었다. 이 근대적 의미의 직업은 동양이나 중세의 직업개념과 다르다.
 서구의 중세(캐토릭사회)에 있어서, 직업은 자연적 질서의 하나이나 도덕적 계율에 있어서는 권고(勸告, Consolia)의 영역이지 명령(命令, Praeceta)은 아니었다. 이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개념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사명(Aufgabe)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도덕적 개념이 있다.  즉  Beruf, Vocation이라는 근대사회의 직업개념은 바로 이 소명(Calling)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3)도올 주장(자료 4)의 비평
 도올은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에서 역사상 특유한 경제 시스템을 결과 시킨 윤리적(또는 근대적)자본주의와 천민자본주의 (Pariakapitalismus)와의 구분을 간과한 채,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금욕주의에서 캐피탈리즘(Capitalism)이 발생 안할 수도 있고, 유교의 현세주의에서 캐피타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 텍스트의 논점은 유교의 현세주의가 발생시킬 수 있는 자본주의가 그 어떤 자본주의 이냐이다.  분명히 밝히거니와 유교의 현세주의가 결코 근대 서구의, 그 특유한 윤리적 자본주의를 발생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유전인자가 다른 동양인이 서양인을 탄생시킬 수 없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6. 도올의 베버 비판
 (1) 베버의 텍스트
 ●자료 6 : 유생들의 방심치 않는 자기제어, 즉 수신의 목적은 외면적 제스츄어나 고상한 매너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있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수신은 기본적으로 심미적인 것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부정적 성격의 것이었다. 그 자체로서 위엄있는 품행, 아무런 실질적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품행만이 존중되고 욕망되었다.(The watchful self-control of the confucian was to maintain the dignity of external gesture and manner, to keep "face."  The self-control was of an aesthetic and essentially negative nature. Dignified deportment, in itself devoid of definite content, was esteemed and desired.)

 자료 7 : 유자들에게는, 세분화된 전문직종은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인가를 불문하고, 진정으로 긍정적인 권위를 갖는 위치로서 인식될 길이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공자가 "논어"에서 한 말, 문화적으로 교양을 쌓은 인간들 즉 군자는 하나의 기(器)로 국한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 즉 군자는 이 세계에 대한 적응 즉 처세나 자신의 완성을 지향하는 수신의 방식에 있어서, 그는 그 자신이 최종적 목적이라고 생각할 뿐, 어떠한 기능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유교윤리의 이러한 핵심은 전문직종의 분업을 거부했으며, 근대적 전문직의 뷰로크라시를 거부했으며, 전문직종을 위한 특수훈련을 거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은 이윤의 추구를 위한 경제학의 훈련을 거부했던 것이다.[For the confucian, the specialistic expert could not be raised to truly posetive dignity, no matter what his social usefulness. The decisive factor was that the "cultured man"(gentleman) was "not a tool"; that is, in his adjustment to the world and in his self-perfection he was an end unto himself not a  means for any functional end. This core of confucian ethics rejected professional specializaton, modern expert bureaucracy, and special training; above all, it rejected training in economics for the pursuit of profit.(RC, p.246)]
 (2) 도올의 원론적 비판
 도올은, "군자불기(君子不器)란 기(器)를 부정하는 언급이 아니라, '무본'(務本)의 뜻을 표방하는 것이다. 소라이(荻生조徠, 1666-1728)의 비판에 의하면 막스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 비판은 근본적으로 과녁이 빗나간 것이다. 근원적으로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불기(不器)는 기(器)의 부정이 아니기 때문이다."라 하며 소라이의 '大低學以成器'(대저학이 성기)를 인용하며, 모든 배움은 기(器)를 이루고(成器), 이 성기(成器)를 통하여 기(器)를 부리는 대도(大道不器)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도올논어(2), p.155]
 도올은 이런 불기(不器)의 논리에 의하여,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로 인하여 동양사상이 얻어 먹어야 했던 베버의 욕지거리를 독자들은 실컷 얻어 먹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도올논어(2), p.149]라고 하며, 베버의 판단을 불쾌히 여겼고, 나아가서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 비판을, '근본적으로 과녁이 빗나갔고, 근원적으로 해당사항이 없다'고 일축했다.[도올논어(2), p.155]
 (3) 도올의 베버 비판에 대한 코멘트
 (가) 기본개념의 이해문제
 (ㄱ) 군자(君子)와 전문직(Professional Specialization)
 도올은 TV강의에서 군자(君子)를 공자 시대에서는 사(射), 서(書), 예(禮), 악(樂)등을 갖춘 도덕적 지도적 인격자로 지칭했다.  이것은 고대희랍(Greece)의 프라톤(Plato, B.C.427-347)의 이상국(The Republic)에서 말하는 지배자계급(gold class)인 엘리트(Elite, 주로 도덕적 철학자)와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공자의 군자(君子, cultured man, gentleman)와 근대 서구의 전문직(Professional)과는 그 개념이 같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도올 자신도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공자언명의 맥락이 과연 근대사회적 특징을 이루는 전문직종에 대한 종사의 거부(巨富)가 군자(君子)됨의 특징이라고 하는 의미의 맥락으로 사용된 것인지는 지극히 불투명하다.'고 말했다.[도올논어(2), p.p.150-151] 공자는 다만 자기시대의 이상적 인간상을 말한 것이지 2000여년 후인 오늘의 군자상(君子像)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ㄴ) 불기(不器)와 제네랄리스트(generalist)
 도올은, '기(器)는 분명 한 그릇의 국한된 기능'이나, 불기(不器)는 무본(務本)과 대도(大道)의 경지라 설명했다.[도올논어(2), p.151, p.155]
 즉 불기(不器)는 기(器)의 세계의 부정이 아니다. 기(器)를 포용하는 대도(大道)이며, 제네랄리스트(generalist)라는 의미를 암시했다.[도올논어(2), p.156]
 즉 소라이와 도올은, '대저 배움이란 기(器)를 이루지 않음이 없다.(大低學以成器)라고 하여 인간의 모든 배움이 기(器)를 이루고(成器), 이 성기(成器)를 초극하여 대도(大道)에 이르는 것이 불기(不器)의 경지요, 제네랄리스트(generalist)라 했다.[도올논어(2), p.155]
 이런 뜻이라면, 공자의 기(器)는 지행적 실용인(知行的實用人)이 아니라 다만 현학적(衒學的) 지식인에 불과한 것같다.  그러나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스페시알리스트(Specialist)는 근대 분업사회의 직업(Beruf, Vocation)인이다. 그리고 도올이 말하는 제네랄리스트(generalist)는 무엇인다?  도올은, '인간과 우주에 대한 근원적 통찰력과 전체적 조망'을 갖는 사람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리 당대의 모든 스페시알리스트는 불기(不器)의 스페시알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도올논어(2), p.156]
도올의 이 주장은 현대적 해석으로는 옳은 말이지만 근대 이전의 유교권 문화사회에는 실업(實業)의 기능인들(동양적 스페시알리스트)은 천시되었다. 이것을 베버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유자들에게는, 세분화된 전문직종은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인가를 불문하고, 진정으로 긍정적인 권위를 갖는 위치로서 인식될 길이없었다."고 (For the Confucian, the specialistic expert could not he raised to truly positive dignity, no matter what his social usefulness.)[도올논어(2), p.148]
 오히려 서구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 태생시킨 전문직업(Beruf)의 스페시알리스트 들이야말로 '우주의 근원적 진리'인 성경(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안에서 살기 위하여 노력한 진정한 제네랄리스트 들이 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나) 도올의 베버 비판
 (ㄱ) 베버의 비교 구절문제
 이미 언급한바 있듯이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에 의한 비교의견(자료 7)을 '베버의 욕지거리, [도올논어(2), p.149]니, 또 '과녁이 빗나갔고 해당사항이 없다.'[도올논어(2), p.155]고 말한 도올의 베버 인식은 재고해 볼 문제점이다.
예컨대 베버는 동서문화(서구근대문화와 동양의 전통문화)의 비교에 있어서, 서구의 근대 자본주의문화의 근원(프로탄티즘)의 대표구절로, '네가 자기사업(직업,사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했고,(베버의 저서, p.44)  이에 대비되는 유교 윤리의 대표적 구절로서는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의 구절을 아필시켰다[도올논어(2), p.142]
 만약 도올이 말한 대로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에 대한 비교방법론이 빗나갔다면, 도올은 유교문화권의 대표적 구절로서, '군자불기'(君子不器)가 아닌 다른 대표구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의 유교문화권(경제사회)의 2000여년간의 농경사회적 정체성(停滯性)과의 무관성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도올은, '군자불기(君子不器)의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던지는 심오한 가치가 존(存)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동양사상의 대표적 구절임을 자인하고 있다.[도올논어(2), p.156]
 (ㄴ) 베버의 텍스트(자료 6,7)해석
 막스베버는 , 유가사회는 서구근대사회와는 달리 물질적 생산에 기여하는 전문직 종사자들 보다는 군자(君子)라는 현학적(衒學的)인 지적문화인(Cultured man)과 내실보다는 인간 체면(face)과 품행이 존중되는 사회라고 인식했다,(참고;자료 6)  그래서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 탄생시킨 서구근대의 자본제 시스템의 요소들인, 전문직(Prefessional Specialization), 현대의 전문관료 조직체제(expert bureaucracy) 특수한 교육제도(Special training, 학교교육등), 이윤추구를 위한 합리적인 기업조직 및 경제학(18-9세기의 고전파 경제학의 놀라운 발전을 상상하라.)이 발달하지 못한 유교권사회의 문화적 배경을 지적했다.
 여기서 특히 유의할 점은 베버이론은 지금부터 1-2세기전의 동서양사회의 문화형(Culture pattern)과 경제시스템의 비교인식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동양사회(유교문화사회)는, 이미 유교문화가 지배적이 아닌 오히려 서구사회화, 그것도 천민자본주의 사회가 되어 버린 하나의 경제적인 세계화 사회(WTO등)속에 있다.
 7. 맺음말
 첫째, 베버가 지적했던 유교권 사회의 체면문화(Face Culture)는 동양특유의 유교권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엄중히 섬겼던 유대교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온통체면치레와 외식(外飾)으로 가장한, 부패한 유대교지도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질타(叱咤)하셨다.
 "저희(유대교 지도자들)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 하는구나."(마23:5-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 하도다."라고(마23:27-28)
 둘째, 막스베버도 서구사회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근대 자본주의 가 19세기 후반기 이래 그 금욕적 윤리성이 퇴색해 가는 역사의 흐름을 바라보고 다음과 같은 경구적(警句的)인 예언을 남겼다. "오늘 날 영리가 최고도로 발달한 합중국(미국)에서 보면 영리활동이 종교적윤리적 의미를 거세 당했기 때문에 순전히 경쟁적인 감정에 휩쓸리는 경향하에 있으며 그 결과는  이미 경(競技)의 성격까지 띠게 되는 경우조차 드물지 않다....이와 같은 문화적 발전의 '최후의 사람'에 관하여는 다음의 말이 진리가 될 것이다.
 '무정신(無精神)의 전문가. 무감성(無感性)의 향락인. 이들 무(無)의 인간들은 인류가 지금껏 도달하지 못한 단계에 올랐다고 자부(自負)하리라.' 고 (베버의 저서, p.161)
 베버의 이 말은, 그때로부터 약 100년이 흐른 오늘의 21세기에, 천민자본주의의 룰(rule)만이 기준이 되는 세계 경기장에서 무(無)의 인간들의 무자비한 무한경쟁으로 실연(實演)되고 있지 않는가. 요컨대 내면적인 도덕적 생명력이 사라진 모든 종교의 교리는, 그 교훈과 교리가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체면문화(體面文化), 또는 외식문화(外飾文化)로 전락하여 도리여 인간의 질곡(桎梏)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 글을 맺는다.  
 ▣ 부록 1
 ● 도올 논어(2) 중에서(p.142~156)
  2-12. 子曰: "君子不器."
          자왈: "군자불기."
 2-1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그릇처럼 국한되지 않는다."
 禱注    공자의 말씀으로서 전해내려 오는 이 "군자불기"라는 말은, 본시 옛부터 유교전통의 핵심적 윤리로서 존중되어온 명언이기도 하지만, 이 말이 20세기 세계학술계의 쟁점(爭點)으로서 지극히 유명하게 된 것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이 말을 그의 역저, "중국 종교"(The Religion of China)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대비되는 유교 윤리의 대표적 구절로서 아필시킨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베버에 의하면 프로테스탄티즘의 경우 순결한 초월주의의 인정이 오히려 현실을 제어하는 힘을 잉태시켰지만, 유교의 경우는 초월주의의 거부가 합리주의 전통을 강화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실에 대한 합리적 제어의 능력을 상실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유교적 삶의 방식은 합리적이긴 했지만,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합리성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예악(禮樂)과 같은 어떤 외면적 규정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라는 것이다.(The is to say, the Confucian way of life was rational but was determined, unlike puritanism, from without rather than from within. RC, N.Y. : The Free Press. 1964, p.247) 그래서 그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p.142~143)
     Confucian rationalism meant rational adjustment to the world; Puritan rationalism meant rational mastery of the world.
     유교적 합리주의는 이 세계에로의 합리적 적응을 의미하는 반면, 청교도 합리주의는 이 세계의 합리적 제어를 의미하는 것이다.
 청교도의 경우, 초월적인 신에게로의 철저한 복속이 비록 내가 이세계 내에 거주하고 있지만 자신의 삶이 이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to live "in" the world and yet not be "of" it,) 어떤 극복의 동기를 부여했으며 그것은 무서운 금욕주의를 잉태시켰다.그리고 금욕주의는 자본의 축적이라고 하는 경제적 합리주의(economic rationalism)의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가장 핵심이 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개념은 독일어로 "베루프"(Beruf)라고 표현되는 "신의 소명"(God′s calling)이다. 이 "베루프" 라는 독일어를 영어로 바꾸면 "보케이션(vocation)이 되는데, 보케이션은 신의 소명 즉 신의 부르심이라는 말과 동시에 "직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이 "베루프"-보케이션"이라는 단어의 배면에는 그 단어의 의미르 탄생시킨 서구 프로테스탄티즘의 문화적 의식구조가 서려있는 것이다. 서구인들은 자기의 현세적 삶의 직업(장인의 직종)을 곧 초월적 신의 소명으로 생각했으며, 그 자체를 성스럽게 생각했으며, 그 직업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초월적 신의 소명을 현세적으로 구현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직업의식이 그 직업의 소명에서 생기는 결과를 현세적으로 향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결과를 신의 영광을 위하여 저축해 나갔던 것이다.
     The typical Puritan earned plenty, spent little, and reinvested his income as capital in rational capitalist enterprise out of an asceticist compulsion to save.(RC, p.247).
     전형적인 청교도들은 많이 벌고 적게 썼다. 그리고 그의 소득을, 절약하고자 하는 금욕주의적 열정으로부터, 매우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사업에 자본으로서 재투자하였다.
 그러나 유교적 군자상에는 이러한 내면적 초극의 충동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p.143-144)
    The watchful self-control of the Confucian was to maintain the dignity of external gesture and manner, to keep "face." The self-control was of an aesthetic and essentially negative nature. Dignified deportment, in itself devoid of definite content, was esteemed and desired.
    유생들의 방심치 않는 자기제어, 즉 수신의 목적은 외면적 제스츄어나 고상한 매너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있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수신은 기본적으로 심미적인 것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부정적 성격의 것이었다. 그 자체로서 위엄있는 품행, 아무런 실질적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임도 불구하고, 그러한 품행만이 존중되고 욕망되었다.
 유교에는 초월성의 측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현세적이고, 사후의 미래적 보장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현세적 달성만을 추구하며, 현세적 향유만을 최선의 가치로 삼는다. 그래서 심미적 인생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여기 "심미적"(aesthetic)이란 말은 "닳아빠진 미감"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부정적인 맥락에서 쓰여진 것이다. 자기내면의 초극의 독백이 없기 때문에 외면적 겉치레만 추구하게 되고, 사회적 관계에서 성립하는 "체면"만을 중시하게 된다."예의"니, "도의"니, "의례"니 하는 모든 것이 이 "체면"과 관련되는 것이다. 여기 베버가 쓴 "face"라는   (p.145)
 말은, 중국말로 "미엔쯔"(面子 면자)라는 말인데, 그것은 우리말로 "체면"에 정확히 해당되는 말이다. 한 마디로 서구 프로테스탄티즘의 문화가 소명의 문화라면 동아시아 유교의 문화는 곧 체면의 문화라는 것이다.
                    서양           소명의 문화(vocation)
                 동양            체면의 문화(face)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이것은 사도바울이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로마서12:6~8). 여기에는 인간의 소명에 대한 이야기가 잘 설명되어 있다. 이 말은 이에 앞서 우리 몸과 지체의 관계를 비유로 들어, 우리 인간들의 삶의 소명을 부연한 것이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로마서12:4-5) (p.146)
     For as in one body we have many members, and all the members do not have the same function, so we, though many, are one body in Christ, and individually members one of another.
 나의 몸은 하나이지만, 이 하나된 몸은 많은 부분(지체)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많은 부분(지체)들은 제각기 다른 고유한 기능(function)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모두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나의 몸은 기능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몸의 지체가 가기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조화된 하나의 몸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된 나의 몸에 비유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개별적 삶을 그 몸의 각기 다른 개별적 지체의 기능에 비유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각기 다른 "기능", "소명"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 다른 직분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몸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사도바울의 이러한 언명은 바로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을 거부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지체일 뿐이며,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p.147)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불기(不器)가 아니라, 하나의  기(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섬기는 자는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위로하는 자는 위로하는 일로, 타이피스트는 타이프치는 일로, 대장장이는 대장장이 일로, 똥푸는 자는 똥푸는 일로, 제각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가 아니라 군자유기(君子唯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버는 말한다.
    For the Confucian, the specialistic expert could not be raised to truly positive dignity, no matter what his social usefulness. The decisive factor was that the "cultured man"(gentleman) was "not a tool" ; the is, in his adjustment to the world and in his self-perfection he was an end unto himself, not a means for any functional end. The core of confucian ethics rejected professional specializaton, modern expert bureaucracy, and special training; above all. it rejected training in economics for the pursuit of profit.(RC, p.246)
   유자들에게는, 세분화된 전문직종은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인가를 불문하고, 진정으로 긍정적인 권위를 갖는 위치로서 인식될 길이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공자가 "논어"에서 한 말, 문화적으로 교양을 쌓은 인간들 즉 군자는 하나의  기(器)로 국한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p.148)
    즉 군자는 이 세계에 대한 적응 즉 처세나 자신의 완성을 지향하는 수신의 방식에 있어서, 그는 그 자신이 최종적 목적이라고 생각할 뿐, 어떠한 기능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유교윤리의 이러한 핵심은 전문직종의 분업을 거부했으며, 근대적 전문직의 뷰로크라시를 거부했으며, 전문직종을 위한 특수훈련을 거부했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은 이윤의 추구를 위한 경제학의 훈련을 거부했던 것이다.
 자아! 이 정도 되었으면 공자 "군자불기"(君子不器)로 인하여 동양사상이 얻어먹어야 했던 베버의 욕지거리를 독자들은 실컷 얻어먹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베버의 유교비판을 결코 부정적으로만 생가하는 사람이 아니다. 구한말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썩어문드러졌던 우리사회의 온갖 병폐를 생각할 때, 그리고 아직까지도 우리사회에 진정한 프로펫셔날리즘(professionalism)의 전통이 결여되어 있다는 현실을 생각할 때, 베버의 비판은 통열하게 우리의 가슴을 저미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먼 나라 이방인이 동양사회의 직접체험이 없는 자로서, 동양사회의 지니고 있는 허약한 급소들을 그렇게 정확히 찌를 수 있었는가 하는 것도 먼저 우리의 학문적 자세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유발시키는 것이다.(p.149)
 그러나 우선 그가 캐피탈리즘의 발생연원의 정신사적 필연성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운운하는 것은, 결과적 사태에 대한 기술은 될 수 있을 지언정, 인과론적인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테스탙티즘의 금욕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안할 수도 있는 것이며, 유교의 현세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적 성향을 캐피탈리즘의 발생으로 유도시키는 해석의 행태에는 그 사상자체 이외의 모든 정치.사회.경제사적 우발적 요인이 관여되어 있는 것이다. 캐피탈리즘의 불발생(不發生)의 원인을 유교에 다 물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캐피탈리즘 그 자체가 유교의 역사에서 발생되어야만 할 어떤 지고의 가치나 목표나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어떠한 사상이든지 동일한 생각의 구조를 유지하더라도, 역사적 맥락에 따라 그것은 건강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며 불건강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유교의 불건강한 시절의 측면만을 들어 유교의 원죄를 다 캐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유교의 부패는 현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부패는 더 더욱 인간세에 끔찍한 것일 수도 있다. 퓨리탄의 금욕주의가 가귀(可貴)한 것이라면, 유교의 금욕주의 또한 그 이상의 진실한 내면을 포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군자부기(君子不器)라는 공자의 언명의 맥락이 과연, 근대사회적 특징을 이루는 전문직종에 대한 종사의 거부가 군자(君子)됨의 특징이라고 하는 의미의 맥락으로 사용된 것인지는 지극히 불투명하다. "기"(器)는 분명 한 그릇의 국한된 기능이라는 뜻이다. 황간(皇侃)의 소(疏)에:  (p.150)
   此章明君子之人, 不係守一業也. 器者, 給用之物也. 猶如舟可汎於海, 不可登山; 車可陸行,    不可濟海. 君子當才業周普, 不得如器之守一也.
    이 장은 군자된 사람은 모름지기 하나의 업을 지키는데 매달리지 말아야 함을 밝힌 것이다.그릇이란 인간에게 한 쓰임을 제공하는 물건이다. 예를 들자면 배는 바다에서는 두둥실 떠 갈 수 있지만 산을 오를 수는 없는 것이다. 수레는 육지를 다닐 수는 있어도 바다를 건널 수는 없는 것이다. 군자는 당연히 그 재능과 업적이 두루 넓게 통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릇이 한 기능을 지키는 것과 같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오규우 소라이(荻生조徠, 1666-1728)는 이러한 류의 논의에 대하여 재미있는 제도사적 반론을 제기한다.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언명도 반드시 소인기(小人器), 군자불기(君子不器)식의 이원론적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주(古注)에서 포씨(苞氏)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p.151)
                    器者,  各周其用.  至於君子, 無所不施也.
    그릇이라는 것은 하나의 쓰임에 국한되는 것이다. 군자에 이르게 되면 베풀지 아니하는 바가 없다.
 주자(朱子)가 "기자(器者), 각적기용(各適其用), 이불능상통(而不能相通).  성덕지사(成德之士),  체무불구(體無不具). 고용무부주(故用無不周), 비특위일재일예이이(非特爲一才一藝而已)." (그릇이란 각기 쓰임이 있는 것이요, 서로 통할 수 없는 것이다. 덕을 이루는 선비는 그 몸이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기능이 통달하지 아니함이 없다. 특별히 한 재능, 한 기예에 국한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한 것도 결국 고주(古注)를 베낀 것인데 이러한 주석은 근원적 제도사적 맥락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라이는 "예기" "학기"의 마지막에 나오는 재미있는 구절을 인용한다.
         鼓無當於五聲.  五聲弗得不和;   水無當於五色,  五色弗得不章.
     북 그 자체는 궁.상.각.치.우 다섯가지 소리에 해당되는 바가 없다. 그러나 다섯가지 소리는 북이 없이는 조화로운 소리를 낼 길이 없다. 물 그 자체는 청.적.황.백.흑의 다섯가지 색깔에 해당되는 바가 없다. 그러나 다섯가지 색깔은 물이 없이는 그 찬란한 색깔을 드러낼 길이 없다.(p.152)
 소라이는 왜 이 "학기"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일까? 소라이의 주석이 간결하여 그 뜻을 명확하게 찝어내기가 힘들지만, 소라이가 노리고 있는 것은 군자(君子)는 이 "학기"의 문장에서 북(鼓)이나 물(水)에 해당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군자불기"(君子不器)의 불기(不器)의 뜻이 고주(古注)가 말하는 바, "무소불시"(無所不施) 즉 그 능력이 두루 통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군자(君子)는 근원적으로 기(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즉 군자(君子)는 본질적으로 기(器)로서 규정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군자불기(君子不器)의 불기(不器)는  기(器)의 부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는 기(器)의 부정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기(器)에 의하여 한정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어떤 본질적 위상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기(器)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器)가 이로 인하여 드러나게 되는 자리라는 것이다. 즉 불기(不器)는 기(器)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器)를 포괄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 "자리"란 무엇일까?  소라이는 군자(君子)는 단순히 도덕적인 인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民)의 장(長)이 되는 리더를 말하며, 그는 기(器)가 아닌 기(器)를 부리는 자이다. 그러므로 기(器)는 백관(百官)을 말하는 것이요, 군자(君子)란 군(君)이나 경(卿)을 말하는 것이다.(器者, 百官也; 君子者,君與卿也.)
 예를 들면 양의(良醫)는 여러 한약재료들을 조합(用藥)하여 처방을 내리고 환자의 병을 치료한다. 이때 양의(良醫)는 군자(君子)요, 약(藥)은  기(器)이다.(p.153)
 즉 의사가 곧바로 초본약재(草本藥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의사는 초본약재들을 부리는 자요, 그것을 배합하여 병을 고치는 사람이다. 어찌 의사가 곧 약재라 할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것이다. 소라이는 앞서 인용한 "예기" "학기"에 연이어 같은 맥락에서 나오고 있는 유명한 말을 다시 인용한다.
     君子曰: "大德不官, 大道不器, 大信不約, 大時不齊. "察此四者, 可以有志於本矣.
    그러므로 군자는 말한다. "위대한 덕성은 하나의 관직에 구애됨이 없고, 위대한 도는 하나의 그릇에 구애됨이 없으며, 위대한 신의는 하나의 약속에 구애됨이 없으며, 위대한 시간은 하나의 절기에 구애됨이 없다." 이 네 가지를 살필 줄 아는 자래야 참으로 학문의 근본에 뜻을 둔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또 무엇인가? 대덕(大德)은 불관(不官)하며, 대도(大道)는 불기(不器)하며, 대신(大信)은 불약(不約)하며, 대시(大時)는 부제(不齊)하다는 것은 곧 군자(君子)가 추구해야 할 것은 기(器)의 말엽의 세계가 아니요 대도(大道)의 근원의 세계임을 말한 것이다.(p.154)
        三王之祭川也, 皆先河而後海; 或源也, 或委也.  此之謂務本.
     하.은.주 삼대의 왕들은 물에 제사지낼 적에 모두 반드시 작은 하천에서 먼저 지내고 큰 바다에서는 나주에 지냈다. 하천이 근원이요, 바다는 말류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컬어 근본을 힘쓴다 하는 것이다.
  군자가 힘써야 할 것은 근본이지 말류가 아니다. 하천이 오히려 군자(君子)의 대도(大道)의 세계요, 바다가 오히려 배관(百官)의  기(器)의 세계인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란 기(器)를 부정하는 언급이 아니라, "무본"(務本)의 뜻을 표방한 것이다. 따라서 소라이의 비판에 의하면 막스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비판은 근본적으로 과녁이 빗나간 것이다. 근원적으로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불기(不器)는 기(器)의 부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라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大저學以成器.
                     대저 배움이란 기를 이루지 않음이 없다.
 인간의 모든 배움은 기(器)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군자(君子)의 배움은 성기(成器)를 통하여 불기(不器)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즉 군자불기(君子不器)는 기(器)를 통하여 기(器)를 초극하는 것이요, 성기(成器)의 행위를 통하여 기(器)를 부리는 대도(大道)의 경지에 나아가는 것이다.(p.155)
 굳이 막스 베버의 논쟁이나 소라이의 비판적 지적의 맥락을 떠나 이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소박한 맥락을 액면 그대로 수용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분명 스페시알리스트의 기능이 존중되어야 하는 문명의 장이다. 그러나 진정한 스페시알리스트의 위치가 존중되면 존중될수록 진정한 제너랄리스트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닐까? 불기(不器)의 세계가 기(器)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물론 기(器)의 세계 또한 불기(不器)의 세계를 거부하지 않는다. 인간과 우주에 대한 근원적 통찰이나 전체적 조망이 없이 어떻게 스페시알리스트들의 기능만으로 인간세가 조작되어 나가기를 기대하는가? 우리 당대의 모든 스페시알리스트는 당연히 불기(不器)의 스페시알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불기(不器)의 보편주의가 전제되지 않는 기(器)의 기능은 편견과 독선과 혼선을 낳을 뿐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공자의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던지는 심오한 가치가 존(存)하는 것이다.(p.156)
         集注       器者, 各適其用, 而不能相通.  成德之士, 體無不具.
                      故用無不周, 非特爲一才一藝而已

 ▣ 부록 2 : 안내 문
              '도올의 논어이야기'에 대하여 

 근간 '도올 신드롬' 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KBS TV1의 '도올의 논어이야기'가 적잖은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키며 계속 방영되고 있습니다. 그 도올(김용옥박사, 중국철학자)의 강의 중 기독교사상(복음)에 관련한 오해의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성경의 허구성 주장과[도올의 논어 이야기 '제5강' 2000.10.27과 '도올 논어(1)',p.p.21-25], 막스 베버(M.Weber, 1864-1920)의 근대 서구의 윤리적 자본주의의 사상에 대한 비판등입니다.['도올의 논어 이야기' 제42강, 2001.3.2, '도올 논어(2)', p.p. 142-156]  이 부분들을 해명하기 위하여 예수 인터넷선교회의 홈페이지에 '도올의 성경관에 대하여'와 '도올과 베버의 대화'라는 신앙에세이를 게재했습니다.
 특히 '도올과 베버의 대화'는, 동서양의 두 석학(碩學)의 세기적인 지상대화(紙上對話)로 접근 시켰습니다.  그 뜻은 이시대(21세기)의 위대한 복음사역자들(Ministers)이  이 글을 통해서 동서양문화의 인프라(Infra)를 이해하시는 데에 작은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서입니다. 부디 예수 인터넷선교회(www.yesu.kimc.net)를 방문해 주셔서 필독하여 주시기를 권유드리옵니다. 감사합니다.  (서기 2001년 3월 중순, 예수 인터넷선교회 드림)

  ▣ 부록 3 : 자유게시판에 올린 어느 독자의 글
  2001/03/26 (14:15) from 211.44.3.143' of 211.44.3.143'
   헤비메탈킴
웃기는 도올과 베버의 대화.
난...

한 가지만은 확실히 해두고 싶다.

도올의 Text는 무엇을 참고로 했는지.

베버의 Text는 무엇을 참고로 했는지.

공정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는지.

마지막으로 하나 더.

에세이인가 보면, 어떤 것은 자신의 의견이라고 하며 슬쩍 단체의

책임회피를 하는 구절도 눈에 띄는데,

그럴 거면 올리지 말지... 쩝.

솔직히, 내가 도올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의 학문이 기껏해야 도올 논어라는 책으로 대표될 수도 없다.

그 책은 [독자의 대상이 없는 책]이다.

만일 도올이 만화책으로 만들었으면, 그림 갖고 꼬투리 잡았을것이

분명하다.

난, 기독교인이지만, 사이비다.

믿음?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기독교인에 대해 악감정 없다.

하지만, 제발 부탁인데, 꼬투리 잡고 우기려고 하진 마라.

그래서 얻는게 뭔데?

다른 이야기 해 보자면,

철학자와 종교인이 만나서 말싸움 하면 누가 이기겠는가?

뻔한 거 아닌가?

말싸움해서 그렇게 이겨보고 싶나?

그런 거 초월도 못하면 그게 종교인의 자세인가?

안티기독교 사이트에 가보니까,

그네들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일리가 있을 뿐이다. 그게 맞는지 틀리는지는 관심이 없어서

생각해 본 바도 없지만,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 가서 폭탄 게시판 올려놓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뭐냐?

대체 무엇하고 싶은건가?

그럴만한 정열이 있으면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던지,

성경책을 읽던지,

구원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인터넷.

허울 좋다.

인터넷에서 십자군 전쟁이라도 해보고 싶은가?
    
독자의 글에 대한 답서
   헤비메탈킴 선생님께
 킴 선생님께서 '도올과 베버의 대화'라는 저희 예수 인터넷선교회의 '신앙에세이'를 코멘트해주신 것을 감사하오며, 몇 가지 의견을 드립니다.

 첫째, 그 '에세이'는 동서양 두 석학의 근대동서양 문화의 근원에 대한 견해를 비교하고 객관적으로 비평한 글입니다.(가치중립적 입장에서입니다)

 둘째, 킴 선생님께서 문의한 도올의 Text는 '도올논어(2)'의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논어 내용이고  베버의 Text는 '근대자본주의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입니다.(이미 그 '에세이'에서 밝혀놓은 것입니다.)

 셋째, 킴 선생님께서 그 '에세이'에 대한 논평을 해주시려면, 구체적으로 문장내용을 제시.분석 하시면서 실명으로 의견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처럼 무조건 냉소적인 매도를 하시는 것은 고도의 사회윤리를 요청하는 디지털 문명시대에 피하여야할 사이버.언어폭력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끝으로 다시 저희 예수 인터넷선교회의 '에세이'에 주신 관심을 감사하오며 킴 선생님의 건승을 기도합니다.
                    2001. 3. 26     예수 인터넷선교회 드림

2014년 9월 24일 수요일

노자의 재발견(안성재), 노자에 대한 관점 바꾼 책 - '도'는 '형이상학적 무위자연' 아닌 '대동'

노자에 대한 관점 바꾼 책
'도'는 '형이상학적 무위자연' 아닌 '대동'
2012년 04월 03일 (화) 16:37:33이형구 시민기자  book@bookdaily.co.kr
[북데일리] 동양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중 한 명이 노자이다. 춘추시대 말기의 사람으로 생각되는 그는 도가(道家)의 창시자이다. 노자는 주나라의 운명이 쇠하는 것을 보고, 자연에 묻힐 것을 결심하고 서방(西方)으로 떠났다.

이 때 쓴 책이 도덕경(道德經)이다. 도가철학은 재야적인 비판철학적 성격으로 이해된다. 현실참여가 강한 공자의 유가 사상과 비교된다. 이는 노자가 현실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소박한 삶을 즐긴데서 비롯된다. 자유로운 정신 세계를 추구한 노자는 나라의 지배층과 세상에 대해 신랄한 비판도 했다. 많은 노자를 연구한 학자들은 그의 정치사상을 무위정치로 보고 있다.

우주 만물의 궁극적인 이치인 도의 본질을 따질 때 이상적인 정치 형태는 무위정치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해석도 있다. <노자의 재발견>(안성재. 어문학사. 2012)도 다른 시각을 보이는 책이다. 도덕경을 비롯한 수많은 책은 사상가의 가치관을 알리려는 설득 과정의 산물이다. 예나 지금이나 책을 쓰거나 강의를 하는 것은 '이해'와 '설득'의 修辭學(수사학) 범주에 속한다.

저자인 안성재 인천대 교수는 몇년 전부터 도덕경에 대해 수사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각 문장구조를 분석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기존 한국과 중국에서 출판된 번역본들의 해석이 도덕경의 본의와 일정한 괴리감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저자는 왕필본(王弼本)을 근간으로 하여 처음부터 다시 전문을 번역했다. 그 결과 노자에 대한 기존관점을 바꾸는 책을 냈다. 그는 책에서 노자의 '도'를 '형이상학적 개념의 무위자연의 도'가 아닌 '대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통치이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출판사 서평

안성재 교수의 <노자> 강의 시리즈 제1편

정치이념으로 본 도덕경
노자의 재구성

노자 사상의 궁극인 ‘대동(大同)’이 뜻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餘他(여타) 諸子學(제자학)들이 그러하듯이, 老子(노자) [道德經(도덕경)]의 집필 의도 역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가치관을 알리려는 ‘이해’와 ‘설득’의 修辭學(수사학)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이 책의 저자인 안성재 교수는 4년 전 [도덕경]에 대해 수사학적 접근을 시도하였는데, 그 과정 특히 각 문장구조를 분석하면서 필자가 섭렵했던 기존 한국과 중국에서 출판된 번역본들의 해석이 [도덕경]의 本義(본의)와 일정한 괴리감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필자는 王弼本(왕필본)을 근간으로 하여 처음부터 다시 [도덕경] 全文(전문)을 번역하게 되었는데, 특히 사전에서 漢字(한자)를 일일이 찾아 그 글자가 지니는 다양한 의미들 중에서 각각의 문장구조와 [도덕경] 전반을 아우르는 문맥의 흐름에 가장 적합한 뜻을 선별하고자 하였다.

노자의 도(道)와 공자의 도(道)는 과연 서로 동떨어진 도(道)인가?
왕필본(王弼本)을 근간으로 한 도덕경 전문 재해석


한국 사회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동양철학을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노자에 대한 비범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도올 김용옥 선생의 『노자와 21세기』라는 책을 필두로 지금까지 『도덕경』, 『논어』, 『맹자』 등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의 불은 꺼지지 않고 있다.
동양고전의 내용은 한눈에 읽어서는 본뜻을 파악할 수가 없고, 微言大義(미언대의: 짧은 말 속에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있음)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정확한 해석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다른 관련이 있는 전적들에 대한 연구가 제반되어야 하고 이를 상호 비교하며 분석해야 마땅하다. 이에 더하여 무엇보다 정확한 문장의 구조를 분석하고 그에 담긴 함의를 도출하는 작업이 도덕경의 본의에 다가가는 기본적인 자세라 할 수 있다. 금번에 출간된 안성재 교수의 『노자의 재구성』은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여 문장과 그 구조를 충실하게 번역하고, 더 나아가 ‘재해석’하는 관점에서 도덕경을 분석하였다. 기존에 한국과 중국에서 출판된 일부 번역본들의 해석이 도덕경의 본의와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이러한 차이를 메우기 위해 도덕경의 재해석 작업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王弼本(왕필본)을 근간으로 하여 처음부터 다시 [도덕경] 全文(전문)을 번역하게 되었는데, 특히 사전에서 漢字(한자)를 일일이 찾아 그 글자가 지니는 다양한 의미들 중에서 각각의 문장구조와 [도덕경] 전반을 아우르는 문맥의 흐름에 가장 적합한 뜻을 선별하고자 노력하였다.
필자는 [도덕경]을 번역하고 난 후, 노자와 공자의 사상이 世間(세간)에서 말하는 ‘道不同, 不相爲謀(도불동, 불상위모: 추구하는 도가 다르면, 함께 도모하지 않는다).’의 관계처럼 전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떠한 측면에서 긴밀하고도 유기적으로 상호 연계하여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도덕경] 각 문장의 眞義(진의)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尙書(상서)], [周禮(주례)], [禮記(예기)], [史記(사기)], [十八史略(십팔사략)]에 나타난 文句(문구)들과 상호 비교해가며 대비시켜 서술하였는데, 필자는 이러한 전적의 문구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문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가급적 直譯(직역)을 원칙으로 하였다.
본 저서에서 필자는 유가의 서적인 『중용』, 『예기』, 『상서』 등의 경전 등을 인용하여 분석한 것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며 추후에 있을 논의에 해설을 제공하고자 하였다.
“노자의 사상을 증명하기 위해 적잖이 儒家典籍(유가전적)의 기록들을 인용한 것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는 엄밀히 말해서 유가사상을 존숭하는 이들이 말하는 ‘道不同, 不相爲謀(도불동, 불상위모)’의 원칙에 위배된다. 하지만 필자는 노자의 [도덕경]을 번역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노자와 공자 이 두 인물의 근본 사상에 적잖은 공통분모가 있음을 발견하였고, 그로 인해서 부득이하게 어떠한 개념을 설명할 때 유가전적에서 그 근거가 되는 문구들을 빌려온 것이니, 추후 노자와 공자의 공통분모와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시 정리하여 소개할 예정이다.”

노자의 ‘도’는 ‘형이상학적 개념의 無爲自然(무위자연)의 도’가 아니라,
‘대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통치이념이다.

노자의 ‘도’는 ‘형이상학적 개념의 無爲自然(무위자연)의 도’가 아니라 ‘대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통치이념으로 봐야 한다. 당시에는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과학적인 개념에서의 우주 대혼돈(카오스)이 아닌, 뒤섞임 즉 하늘과 땅과 사람과 동물 자연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상태를 ‘대동’이라고 일컬었다. 다시 말해서 노자는 ‘소강’을 추구하는 세태에 반대하여, 그보다 더 상위개념에 있는 ‘대동’으로 돌아가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대동 사회는 어떠한 말이나 제도 등의 명분화된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삼가고 노력하며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기에, 노자는 항상 ‘도’를 이야기 할 때 모호하고 명확하지 않으며 말로 형용할 수 없기에 반대로 말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노자는 가장 오래된 이상주의를 꿈꾸던 사람이었고, 그의 [도덕경]은 가장 오래된 이상주의적 정치 이념 서적이었다.
아울러 노자가 周(주)나라 말기 즉 春秋時代(춘추시대) 초기의 인물이었던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가치관을 분석하기 위해서 춘추시대 이전인 三皇五帝(삼황오제)와 夏(하) 商(상) 周(주) 三代(삼대)의 史實(사실)만을 뽑아 분석했음을 알려둔다. 특히 노자 사상의 궁극이 ‘대동’이기 때문에, 삼황오제의 기록에 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각 章(장)의 문단 구분은 가급적 한 문장씩 끊어서 분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나, 그 의미가 연결되어 분리하기가 용의치 않는 경우에는 하나의 문단으로 묶어 설명하였음을 밝혀둔다.

-나오는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