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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4일 월요일

실재론, 반실재론, 존재론

http://blog.daum.net/nanomat/118

- 아래의 인용문은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의 블로그 글 <<실재론, 인식론, 과학, 그리고 과학주의(Realism, Epistemology, Science, and Scientism)>>에서 일부를 옮긴 것이다.

――――――――――――――――――――

[...]
"실재론", "반실재론", "인식론", 그리고 "존재론"이라는 술어들을 사용하여 가능한 네 가지 입장을 구별하자.
[...]
1. 실재론적 인식론(Realist Epistemology): 실재론적 인식론은 우리가 세계의 객체들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는 입장인데,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표상들이 그것들 자체와 정확히 같을 것이다. 여기서 정신은, 세계의 객체들로부터 데이터를 있는 그대로 그저받은 다음에 충실하게 보고하는, 수동적인 세계 수용자로 취급된다.

2. 반실재론적 인식론(Anti-realist Epistemology): 반실재론적 입장은 훨씬 더 복잡하다. 여기서는 인식자가 수동적인 수용자가 아니라, 입력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는데, 개념, 실천, 언어, 사회적 범주 등을 통해 입력을 조직하여 인식자의 경험의 층위에서 이런 입력에 특정한 형식이나 구조를 부여한다. 여기서 나는, 블랙박스 모형이 반실재론적 인식론과 실재론적 인식론 사이의 차이에 관해 생각하는 가장 쉬운 방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재론적 인식론은 수용된 자극을 기록만 할 뿐인 수동적인 수용자로 다루는 반면에,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은 세계로부터의 자극을 이후에 블랙박스의 구조(언어, 사회적 범주, 정신의 선험적 개념 등)에 의해 처리되는 입력으로 여기는데, 블랙박스는 자체를 거치는 자극을 처리하여 그것과 다른 출력을 산출한다. 내가 보기에, 블랙박스 모형은 모든 반실재론적 입장에 공통적이다. 그것들이 다른 지점, 그것들이 논쟁를 벌이는 논점은 그 블랙박스가 어떤 처리 메커니즘을 포함하고 있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물론 반실재론적 인식론은 당연히 인간중심적일 것인데, 지식에 관한 문제는 우리인간들이 세계를 어떻게 알게 되는지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3. 반실재론적 존재론(Anti-Realist ontology): 존재론은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라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의미에서 무엇이 존재하며 어떤 동역학이 이런 존재자들을 지배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그러므로 반실재론적 존재론은 존재자들의 존재―존재자들은 무엇인가―를 우리의 작은 블랙박스의 출력과 등치시키는 존재론이다. 그 논제에 따르면, 존재는 블랙박스의 출력―(데리다가 <<그래마톨로지>>에서 서술한 대로) 표명, 또는, 칸트가 서술한 대로, 현상―이라는 것이다. 반실재론적 존재론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존재는 두 가지 의미로 진술된다는 점을 유의하자. 한편으로, 존재는 블랙박스의 출력과 등치된다. 그렇지만 출력은 입력 없이는 블랙박스에 의해 산출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입력은 어딘가에서 와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블랙박스(여기서 블랙박스는 정신과 직관의 선험적 범주들, 디페랑스의 작용, 현존재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것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에 대해 입력을 제공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한 유형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요약하면, 반실재론적 존재론들은 헤겔적 또는 버컬리적 경로를 택하지 않는다면 존재를 일의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4. 실재론적 존재론(Realist ontology): 반실재론적 존재론자들이 "존재란 (우리에 대한) 현상이다"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실재론적 존재자들은 우리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존재자들이(예를 들면, 화폐) 있지만, 이것이 존재의 전부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창을 통해 나무를 바라볼 때] 나무가 창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의미에서 인간들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들도 있으며, 우리는 존재가 의미하는 바의 특질들에 관해 매우 일반적이지만 유의미한 것을 말할 수 있다.

인식론에 대한 이런 두 가지 가능성과 존재론에 대한 이런 두 가지 가능성을 개략적으로 언급되었으니 이제 이런 입장들의 조합들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알아챌 것이다. 그런 입장들이 세 가지 있다.

1. 실재론적 인식론과 함께 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실상 실재론적 인식론을 옹호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한다.

2. 반실재론적 인식론과 반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대륙철학의 지배적인 입장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3. 반실재론적 인식론과 함께 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이 옹호하는 것은 세 번째 입장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은 올바르게도 실재론적 인식론을 소박하며 독단적인 입장이라고 거부한다. 우리가 사물들을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이나 학문들 내부의 학문분과적 경계들이 존재하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지도를 그린다고 가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 게다가 자신들의 인식론적 탐구에서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은 올바르게도 현상을 조직하고, 지식을 생산하며, 기타 등등에 있어서 블랙박스에 의해 수행되는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우리는 우리의 블랙박스가 출력의 산출에 기여하는 바에 관한 이런 논쟁들을 가져야 하고, 반실재론적 인식론의 전통이 발견한 중요한 결과들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과 실재론적 존재론자들이 갈라지는 지점은 존재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에 관한 의문들이 존재들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데 충분하다라는 논제에 대해서이다.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의 경우에는, 우리가 저쪽에 있는 객체들을 어떻게아는지에 관한 의문들을 넘어서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에 관한 중요하고 결정적인 의문이 여전히 있다. 이 의문은, 로이 바스카를 따르면, 실재론적 존재론자들의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에 의해 철저히 규명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객체지향 존재론자는 우리 지식의 한계, 무엇이든 어떤 특수한 유형의 객체를 알기 위해서는 탐구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 기타 등등을 쉽게 인정하지만, 탐구에서 그리고 탐구를 통해서 발견되는 차이들이 출력의 영역에만 속하는다는 논제는 거부한다. 오히려 실재론적 존재론자는 이런 차이들이 출력에만 한정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런 차이들을 산출하는, 정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입력, 즉 세계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

번역: 김효진

2014년 9월 24일 수요일

노자의 재발견(안성재), 노자에 대한 관점 바꾼 책 - '도'는 '형이상학적 무위자연' 아닌 '대동'

노자에 대한 관점 바꾼 책
'도'는 '형이상학적 무위자연' 아닌 '대동'
2012년 04월 03일 (화) 16:37:33이형구 시민기자  book@bookdaily.co.kr
[북데일리] 동양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중 한 명이 노자이다. 춘추시대 말기의 사람으로 생각되는 그는 도가(道家)의 창시자이다. 노자는 주나라의 운명이 쇠하는 것을 보고, 자연에 묻힐 것을 결심하고 서방(西方)으로 떠났다.

이 때 쓴 책이 도덕경(道德經)이다. 도가철학은 재야적인 비판철학적 성격으로 이해된다. 현실참여가 강한 공자의 유가 사상과 비교된다. 이는 노자가 현실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소박한 삶을 즐긴데서 비롯된다. 자유로운 정신 세계를 추구한 노자는 나라의 지배층과 세상에 대해 신랄한 비판도 했다. 많은 노자를 연구한 학자들은 그의 정치사상을 무위정치로 보고 있다.

우주 만물의 궁극적인 이치인 도의 본질을 따질 때 이상적인 정치 형태는 무위정치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해석도 있다. <노자의 재발견>(안성재. 어문학사. 2012)도 다른 시각을 보이는 책이다. 도덕경을 비롯한 수많은 책은 사상가의 가치관을 알리려는 설득 과정의 산물이다. 예나 지금이나 책을 쓰거나 강의를 하는 것은 '이해'와 '설득'의 修辭學(수사학) 범주에 속한다.

저자인 안성재 인천대 교수는 몇년 전부터 도덕경에 대해 수사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각 문장구조를 분석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기존 한국과 중국에서 출판된 번역본들의 해석이 도덕경의 본의와 일정한 괴리감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저자는 왕필본(王弼本)을 근간으로 하여 처음부터 다시 전문을 번역했다. 그 결과 노자에 대한 기존관점을 바꾸는 책을 냈다. 그는 책에서 노자의 '도'를 '형이상학적 개념의 무위자연의 도'가 아닌 '대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통치이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출판사 서평

안성재 교수의 <노자> 강의 시리즈 제1편

정치이념으로 본 도덕경
노자의 재구성

노자 사상의 궁극인 ‘대동(大同)’이 뜻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餘他(여타) 諸子學(제자학)들이 그러하듯이, 老子(노자) [道德經(도덕경)]의 집필 의도 역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가치관을 알리려는 ‘이해’와 ‘설득’의 修辭學(수사학)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이 책의 저자인 안성재 교수는 4년 전 [도덕경]에 대해 수사학적 접근을 시도하였는데, 그 과정 특히 각 문장구조를 분석하면서 필자가 섭렵했던 기존 한국과 중국에서 출판된 번역본들의 해석이 [도덕경]의 本義(본의)와 일정한 괴리감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필자는 王弼本(왕필본)을 근간으로 하여 처음부터 다시 [도덕경] 全文(전문)을 번역하게 되었는데, 특히 사전에서 漢字(한자)를 일일이 찾아 그 글자가 지니는 다양한 의미들 중에서 각각의 문장구조와 [도덕경] 전반을 아우르는 문맥의 흐름에 가장 적합한 뜻을 선별하고자 하였다.

노자의 도(道)와 공자의 도(道)는 과연 서로 동떨어진 도(道)인가?
왕필본(王弼本)을 근간으로 한 도덕경 전문 재해석


한국 사회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동양철학을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노자에 대한 비범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도올 김용옥 선생의 『노자와 21세기』라는 책을 필두로 지금까지 『도덕경』, 『논어』, 『맹자』 등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의 불은 꺼지지 않고 있다.
동양고전의 내용은 한눈에 읽어서는 본뜻을 파악할 수가 없고, 微言大義(미언대의: 짧은 말 속에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있음)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정확한 해석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다른 관련이 있는 전적들에 대한 연구가 제반되어야 하고 이를 상호 비교하며 분석해야 마땅하다. 이에 더하여 무엇보다 정확한 문장의 구조를 분석하고 그에 담긴 함의를 도출하는 작업이 도덕경의 본의에 다가가는 기본적인 자세라 할 수 있다. 금번에 출간된 안성재 교수의 『노자의 재구성』은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여 문장과 그 구조를 충실하게 번역하고, 더 나아가 ‘재해석’하는 관점에서 도덕경을 분석하였다. 기존에 한국과 중국에서 출판된 일부 번역본들의 해석이 도덕경의 본의와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이러한 차이를 메우기 위해 도덕경의 재해석 작업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王弼本(왕필본)을 근간으로 하여 처음부터 다시 [도덕경] 全文(전문)을 번역하게 되었는데, 특히 사전에서 漢字(한자)를 일일이 찾아 그 글자가 지니는 다양한 의미들 중에서 각각의 문장구조와 [도덕경] 전반을 아우르는 문맥의 흐름에 가장 적합한 뜻을 선별하고자 노력하였다.
필자는 [도덕경]을 번역하고 난 후, 노자와 공자의 사상이 世間(세간)에서 말하는 ‘道不同, 不相爲謀(도불동, 불상위모: 추구하는 도가 다르면, 함께 도모하지 않는다).’의 관계처럼 전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떠한 측면에서 긴밀하고도 유기적으로 상호 연계하여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도덕경] 각 문장의 眞義(진의)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尙書(상서)], [周禮(주례)], [禮記(예기)], [史記(사기)], [十八史略(십팔사략)]에 나타난 文句(문구)들과 상호 비교해가며 대비시켜 서술하였는데, 필자는 이러한 전적의 문구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문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가급적 直譯(직역)을 원칙으로 하였다.
본 저서에서 필자는 유가의 서적인 『중용』, 『예기』, 『상서』 등의 경전 등을 인용하여 분석한 것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며 추후에 있을 논의에 해설을 제공하고자 하였다.
“노자의 사상을 증명하기 위해 적잖이 儒家典籍(유가전적)의 기록들을 인용한 것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는 엄밀히 말해서 유가사상을 존숭하는 이들이 말하는 ‘道不同, 不相爲謀(도불동, 불상위모)’의 원칙에 위배된다. 하지만 필자는 노자의 [도덕경]을 번역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노자와 공자 이 두 인물의 근본 사상에 적잖은 공통분모가 있음을 발견하였고, 그로 인해서 부득이하게 어떠한 개념을 설명할 때 유가전적에서 그 근거가 되는 문구들을 빌려온 것이니, 추후 노자와 공자의 공통분모와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시 정리하여 소개할 예정이다.”

노자의 ‘도’는 ‘형이상학적 개념의 無爲自然(무위자연)의 도’가 아니라,
‘대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통치이념이다.

노자의 ‘도’는 ‘형이상학적 개념의 無爲自然(무위자연)의 도’가 아니라 ‘대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통치이념으로 봐야 한다. 당시에는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과학적인 개념에서의 우주 대혼돈(카오스)이 아닌, 뒤섞임 즉 하늘과 땅과 사람과 동물 자연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상태를 ‘대동’이라고 일컬었다. 다시 말해서 노자는 ‘소강’을 추구하는 세태에 반대하여, 그보다 더 상위개념에 있는 ‘대동’으로 돌아가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대동 사회는 어떠한 말이나 제도 등의 명분화된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삼가고 노력하며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기에, 노자는 항상 ‘도’를 이야기 할 때 모호하고 명확하지 않으며 말로 형용할 수 없기에 반대로 말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노자는 가장 오래된 이상주의를 꿈꾸던 사람이었고, 그의 [도덕경]은 가장 오래된 이상주의적 정치 이념 서적이었다.
아울러 노자가 周(주)나라 말기 즉 春秋時代(춘추시대) 초기의 인물이었던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가치관을 분석하기 위해서 춘추시대 이전인 三皇五帝(삼황오제)와 夏(하) 商(상) 周(주) 三代(삼대)의 史實(사실)만을 뽑아 분석했음을 알려둔다. 특히 노자 사상의 궁극이 ‘대동’이기 때문에, 삼황오제의 기록에 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각 章(장)의 문단 구분은 가급적 한 문장씩 끊어서 분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나, 그 의미가 연결되어 분리하기가 용의치 않는 경우에는 하나의 문단으로 묶어 설명하였음을 밝혀둔다.

-나오는 글 중에서-

2014년 8월 30일 토요일

성性- 4. 무선무악無善無惡, 고지마 쓰요시 지음, 신현승 옮김, ,송학의 형성과 전개, 논형, 2004.

성性-무선무악無善無惡 致知
2010/08/03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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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마 쓰요시 지음, 신현승 옮김, <2. 성性- 4. 무선무악無善無惡>, <<송학의 형성과 전개>>, 논형, 2004.
p.123
가정嘉靖 6년(1527) 9월, 도적토벌의 칙명을 받고 왕수인王守仁은 소흥紹興을 출발하려고 하였다. 이때 유명한 제자인 전덕홍錢德洪과 왕기王畿 두 사람이 새삼스럽게 스승의 성설에 대해 질문하고 토의한 내용은, 후세에 장소의 이름을 채택하여 천천교문답天泉橋問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p.124
왕수인의 사구교四句敎는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은 마음의 본체이고,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은 의意의 발동이고,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은 양지良知이고,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은 격물格物이다"라고 하는 네 가지인데, 이것의 의미를 둘러싸고 논의는 전개된다.
전덕홍이 수양·노력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이 사구를 높게 평가하는 데 반해, 왕기는 마음의 본체를 중시하는 입장으로부터 뒤의 삼구三句도 모두 '선도 없고 악도 없다(無善無惡)'라고 해야만 된다고 주장하였다. 왕수인의 대답은 타고난 소질을 지닌 사람은 본체를 깨달으면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에 왕기의 사고방법은 그것으로 올바른 것이겠지만, 보통 사람을 상대로 해서 적용하는 경우에는 전덕홍의 방법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일방적으로 어는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되다고 하는 것이었다. 양명학은 왕수인의 사후에 좌우 양파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이 문답에서 그 분열의 징조가 보인다고 하겠다. 여하튼 왕기는 좌파, 전덕홍은 우파이다.
사구교는 <<대학>> 팔조목의 전반부 네 개에 대해 순서를 거꾸로 하여 나열한 것이었다. 주자학의 경우와는 달리 양명학의 '격물格物'은 사물과의 관계 양태를 바르게 하는 것이고, '치지致知'는 '치양지致良知' 즉 각자에게 갖추어진 천리天理로서의 양지를 올바르게 발휘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위한 마음의 준비가 성의誠意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의 올바른 모습이 밝게 드러나는데 그것이 정심正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거기에 시간적인 순서는 없다. 팔조목의 계제성階梯性은 궁극의 목적인 평천하에 도달하는 논리적인 단계로서 이해되었다. 그렇게 된 것은 궁리격물에 의한 수양방법의 한계에 부딪히게 된 왕수인인 대안으로
p.125
이러한 이해의 방법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 왕기는 마음의 본래의 모습에 선악이 없는 이상, 그 현상인 의意 이하도 선악으로 불러야만 할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왕수인이 양자를 조정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양쪽에 모두 찬성하였기 때문이다. 무선무악은 왕수인의 성설이지만, 이것은 성의 본체는 이발 단계에서의 선악을 뛰어넘는 차원에 있다고 하기 위한 것으로, 요컨대 장구성 등의 논법과 비슷한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양명학에서도 맹자의 성선설을 신봉하는 것이고 그 지극한 선(至善)의 성을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선善과는 구별해서 무선무악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단지 그러한 어떤 성설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성을 선악의 범주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 된다고 하여 그러한 사소한 개념 규졍에 구애되는 지知의 상태를 빠져나오는 방법으로서의 양지의 개념이 설명되었다.
따라서 성에는 선도 악도 없다는 왕수인이 주장하는 진정한 뜻은 성에 관하여 이것저것 논하는 것 자체의 헛됨을 지적한 것이라고 생각할 구 있다. 주희가 엄밀하게 구별한 성性과 심心의 관계도 왕수인은 어떤 힘도 들이지 않고 건너뛰어 버린다. ... <<전습록>> 권 하下에 있는 ... 문답에서는 '성의 본체에는 원래 선도 악도 없다'고 되어 있지만, 천천교문답에서는 '무선무악은 마음의 본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주자학의 '성즉리性卽理'설에 대하여 양명학이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왕수인은 심·성·리를 구별하는 것이 학문적으로 유효하다는 사고방식 그 자체를 반대했던 것이다.





<<전습록>> 권 상上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p.126
"회암晦庵(朱熹) 선생은 <<대학혹문>>에서 '사람이 학문ㅇ르 할 수 있는 것은 마음과 리(心與理)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이 표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생이 말씀하셨다.
"마음이 곧 본성이고 본성이 곧 리이니라. 그 중간에 '~과(與)'라는 글자를 넣은 것은, 그것을 두 가지의 다른 것으로 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잘 살펴야 하느니라."
주희도 마음(心)과 리를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 다음의 발언에 잘 나타나 있다.
마음은 원래부터 주재主宰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의 이른바 '주재한다'고 하는 것은 곧 리理이다. 마음이란 별도로 리라는 것이 있거나, 이 리와는 별도로 마음이라는 것이 있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朱子語類>> 권1) (ㅋㅋ역시 어류 번역은 난해해...)
다만 주희는 그 말이 가리키는 내용으로서 이 양자를 엄밀히 구분한다. ...
주자학의 '성즉리'가 "우리들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본성은 천지만물을 관통하고 있는 리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라는 의미에서의 '즉卽'이었던 것에 비해, 양명학의 '심즉리'란 여기에서 왕수인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마음과 리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라는 의미에서의 에두르지 않고 솔직한(???) '즉卽'이었다. 그것은 학설의 차이라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학문체계(學知)의 이질성에 뿌리박혀 있다.
p.127

인심과 도심 - 몽배원

인심과 도심 - 몽배원 致知
2009/01/04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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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배원, <<성리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08.
'미발'과 '이발'이 사람의 주체의식, 특히 정감의식과 잠재된 본체의식에 대해서 분석하고 해석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도심'과 '인심'은 현상적으로 이미 발한 것, 즉 이미 밖으로 표현된 주체의식에 대해서 분석하고 해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도심·인심과 미발·이발 사이에는 논리적 연관성이 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전자는 후자를 구성하고 있는 한 부분이고, 내용적으로 말한다면 전자는 후자가 한 단계 더 전개된 것이다.



1. 송대 이전
도심과 인심은 <<고문상서>> <대우모>편에 제일 먼저 나타나는데, 거기에서는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마음을 정미하고 한결같이 하여 中을 잡으라"라고 말한다. 이 말은 도의의 심은 은미
p.581
하여 잘 드러나지 않고 보통 사람들의 심은 위태하여 안정되기 어려우므로, 오직 심을 정미하고 한결같이 하면서 다른 것을 섞지 않아야 중을 보존하고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뒷날 순자는 <해폐>편에서 <<도경>>을 인용하여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한데, 오직 지혜로운 군자라야 위태로움과 은미함이 나누어지는 기미를 알아차릴 수 있다"라고 말한다. 지금으로서는 <<도경>>이 어떠한 책인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순자 이전에 이미 도심과 인심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순자의 사상에 따르면 인심은 일반적인 사물을 아는 마음을 가리키고, 도심은 도를 아는 마음을 가리킨다. 도는 하늘의 도와 사람의 도를 포함하는 것으로, 객관사물들의 보편법칙을 가리킨다. 심은 허일이정하기 때문에 리를 살피고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는데,.. 이렇게 도를 아는 마음이라야 만물을 마름하고 관장할 수 있다. 순자의 중심 사상은 이지적인 마음의 인식능력에 잘 표현되어 있다. 만약 이러한 사유의 방법에 따라서 발전했다면 훌륭한 인식이론의 발전이 있었겠지만, 실제로 이러한 발전은 없었다.(--;)
2. 북송시대
p.582
도심과 인심이 성리학 심성론의 중요한 개념이 된 것은 정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도심을 도에 합치하는 심 혹은 도를 깨닫는 심으로 해석했지, 지식에 관계된 인식심으로 해석하지는 않았다. 도를 깨닫는 심이란 바로 자아 체험의 도덕본심으로, 다시 말해 이것은 깨닫는 것을 마음으로 여기는 그러한 심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도덕의식과 도덕관념이다... 정이는 사람마다 모두 선험적인 도덕본심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
이것은 바로 내재된 이성의 원칙이며 또한 도덕본체의 자기현현으로, 사실상 내재화된 사회윤리의식이다.
인심은 감성과 같은 자연적인 본능이나 물질욕망 등의 개인의식으로 설명된다. 여기에서는 개인의식과 집단의식이 관계가 문제로 제기되는데,
p.583
이 부분은 성리학 심성론이 한 단계 더 발전한 모습이다. 하지만 정이는 인심, 즉 개인의식을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을 취한다. ...
정이는 도심과 인심을 대립시켜, 도심은 바른 것이고 인심은 사악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정미하고 한결같은 공부를 함으로써 도심을 잘 보존하여 인심에 의해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정이가 보기에 도심과 인심 곧 집단의식과 개인의식은 대립적이기 때문에 조화될 수 없고, 따라서 이 둘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반드
p.584
시 인심을 없애버려야 도심을 보존할 수 있다... 그는 도심과 천리를 같은 것으로 보고, 인심과 인욕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그 자체로 개인의 이익과 개인의 의식을 희생시켜 집단의 이익과 집단의 의식에 복종시키려는 의미를 가진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3. 남송시대
주희는 정이의 관점이 가진 극단성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정이의 견해를 고쳐 인심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제기했다. 또한 인심에 대해 좋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더욱이 그것을 소멸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
p.585
주희가 "사람은 하나의 심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을 때의 심은 지각하는 심이지 본체의 심은 아니다. 지각하는 심은 비록 본체의 심과 떨어질 수는 없지만, 형이상의 초월적인 심과 같은 수는 없다. 형이하의 지각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말하면, 리를 지각해야 할 뿐 아니라 기도 지각해야 한다. 여기에서 도심과 인심의 구별이 생겨난다.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들 모두가 가지고 있다. 그 지각되는 것에는 이성에 의해서 지각되는 것도 있고 감성에 의해서 지각되는 것도 있는데, 이 역시 사람들 모두가 가지고 있다. 도덕이성에 대한 자기인식이 바로 도심으로, 의리지심이라고도 부른다. 이에 비해 생리적 필요에 따라 발생하는 감성을 인식하는 것이 인심으로, 물욕의 심이라고도 부른다... 인식주체로서의 사람은 이성적 측면과 감성적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또한 집단의식과 개인의식도 함께 가지고 있다. ...
p.586
주희는 또한 도심은 도덕적 의리에서 생하거나 발하고, 인심은 육체적 욕망에서 생하거나 발한다고 생각했다. ...
지각은 주체의식의 인식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에서 생겨난다'거나 '~에서 발생한다'라는 말은 근원의 측면에서 말한 것으로, 이러한 두 가지 설명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주희가 보기에 도심과 인심은 모두 성에 근거하지만, 도심은 본연지성에 근거하고 인심은 기질지성에 근거한다. 도심은 선험적 도덕의식이고, 인심은 생리적 욕구이다. 하지만 주희는 도심과 인심을 근원의 측면에서보다 인식주체의 인식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말한 지각을 더 강조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의리에서 지각하는 것은 도덕의식의 자각 또는 도덕의식의 직각이고, 욕망에서 지각하는 것은 배고프고 추우며 아프고 가려운 것 등과 같은 감성적 지각이다. 이것이
p.587
바로 인심과 도심에 대한 주희의 기본적인 해석이다. ...
입이 좋은 맛을 원하는 것, 눈이 좋은 색을 보기 원하는 것, 귀가 좋은 소리를 듣기 원하는 것, 코가 좋은 냄새를 맡기 원하는 것, 육체가 편안하기를 원하는 것 등은 모두 성이지만, 이러한 것에 따라서 지각하게 되면 바로 인심이 된다. 이것이 비록 성의 본원은 아니지만, "성 가운데 이 리가 있어서, ... 저절로 이와 같이 드러나는 것이다."(惟性中有此理, ... 自然發出如此.) ...
그는 도심과 인심 모두 이발한 심 상태를 가리켜서 말하고 있으며,.. 측은지심 등과 같은 것을 도심이라 하고 희노애락과 같은 것을 인심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이것은 도덕정감과 자연정감을 말한 것이다. 도심은 바로 현실적 감성
p.588
의 형식을 통해 초월적 도덕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
인심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것에 빠져 도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잊어버리면 그것 역시 해가 된다. 따라서 인심은 반드시 도심의 주재와 조절을 받아서 바름으로 돌아가야 한다. ...
하지만 인심 이외에 달리 도심이 있어서 그것이 인심을 통제하고 지배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인심과 도심은 본질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층차의 구분만 있을 뿐이다.
p.589
자아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식은 공공의 윤리의식에 복종하고, 윤리의식은 개인의식을 통해 표현된다. 주희는 윤리의식이 개체의식과 따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이것은 주희의 사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동시에 그는 개인의식과 윤리의식 사이에는 대립되는 일면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는데, 이것 역시 중요한 부분이다.

2014년 8월 26일 화요일

프러세스 웤(Process Work)

http://www.aamindell.net/korean-pw/

프러세스 웤(Process Work)


프러세스 웤 이론, 응용, 그리고 그것의 여러가지 측면
프러세스 웤에는 여러가지 다양한 측면이 있다. 그 다양한 측면들은 ‘변화’, 즉, ‘과정’과 다오(도가사상에서의 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일개의 ‘과정’은 자연을 따르면서 내면의 세계나 외부 주변 우주의 많은 측면들을 포함한 다양한 영역으로 움직여 나가기도 한다. 이것을 하는 치유작업자들이나 수련자들은 자기들 자신과, 상대, 그룹의 ‘변함’을 따르려 한다. 그것을 위해서 여러가지 방식이나 형식의 ‘알아차리는 것’을 사용한다. 그것은 신호나 부분역할에 집중을 두기도 하고, 개인, 부분역할, 세계가 서로 연결된 점에 집중을 두기도 한다.
창작, 음악, 미술, 혼수상태, 변형의식상태, 정신병, 동작이나 무용, 명석몽(자각몽), 영성, 물리학, 심리학, 조직, 세계작업, 정치, 팀과 그룹작업, 인간이나 대상관계, 개인, 꿈작업 등등이 그 다양한 측면에 포함되나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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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세스웤 이론에 대하여
흔히 유럽과 아시아에서 과정지향 심리학(Process Oriented Psychology), 혹은 약자로 “팦(POP)” 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프러세스웤(Process Work), 약자로 “피떠블유((PW)” 란 다문화적이고, 다단계적인 알아차림, 통찰, 깨달음(자각)과 앎의 교육과정이며 정신과 마음의 수련, 영성개발, 자기 의식개발, 자기 성장, 자기 변화, 더 나아가서는, 인류 의식 개발, 진화, 변화 와 성장에 도움이 되는 정신과 마음의 수련기법이기도 하다. 이것은 개인, 인간관계, 크고 작은 살아있는 조직체들 모두의 ‘자기’발견을 지지해주고 받들어주는 진화적이며 초학문적인 방식으로써, 내면의 문제거리, 인간관계의 문제거리, 팀이나 어느 단체 그리고 세계의 문제거리를 해명하고 또한 그것들을 풀려할 때 “진상” 과 “상상” 의 심리적, 신체적 과정을 추적하는데 있어 특히 ‘알아차림’에 집중을 둔다. 누구나 쉽게 그 이론과 방법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고 시험해볼 수도 있다. 프러세스웤에는 크게 세단계의 집중이 있다.
1. 실재현실단계에서는 개인개발, 관계개발, 사업개발, 도시개발과 연관된 실재의 사건들과 문제들을 다룬다. 그룹이나 개인들은 감정과 사실들을 사용하여 갈등이나 무슨 문제거리를 묘사한다.
2. 꿈세계단계에서는 꿈, 심층의정서, 말못한 사실과 진실, 말과 일치하지않는 무의도적, 무의식적인 몸짓이나 행동, 유령적 인물(대화속의 ‘너와 나’가 아닌 제3의 인물, 개인이나 조직의 이야기나 신화속에 나오는 유령역할들을 다룬다.
3. 일원적이고 원초적인 본질이나 본성 (Essence) 단계에서는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고 느껴지기는하나 말로 쉽게 표현될 수 없는 ‘경향이나 동향’(tendencies)을 다룬다. 인생의 이 영역은 마치 사람이나 사건주위의 원동력인 것처럼 때때로 느껴지기는하나 표현될 수 없는 현묘한 분위기와 같은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이 단계는 마치
a. 도가사상에서 말하는 “道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것” 이고,
b. 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하이젠버그 (Heisenberg) 의 양자파기능 (quantum wave function)의 경향, 데이비드 봄 (David Bohm)의 선행파 (pilot wave) 와 같은 것이고,
c. 비이원성: 무갈등, 4차원 이상의 초공간, 사건의 개관을 볼 수 있는 관조의 거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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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세스 웤 적용과 응용
배움이란 것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마치 한 송이의 꽃을 볼 때 주위의 여러 다른 꽃잎들을 눈여겨 보지않고 어느 한 꽃잎만 볼 수 없다는 것과 같다. 예를들면, 정치학은 꿈작업없이는 연구될 수없고, 혼수작업은 가족작업과 소그룹 작업 없이 이해될 수 없고, 비정상적 정신상태는 정치와 함께 연구되어야 하며, 세계(현세)작업은 꿈작업과 심인성 질환의 신체작업이 필요하고, 물리학은 심리학과 더불어야 일리가 있고, 심리학은 전체 우주를 연구하는 우주학과 더불어 연구되어야 한다.
프러세스 웤의 적용과 응용도 일종의 많은 꽃잎을 가진 “꽃”을 형성한다.
꽃의 중앙은 “알아차림 작업” 을 뜻한다. 즉, 순간순간, 그때그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혹, 일어나려고 하는지 주시하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다. 응용되고 있는 분야는 신체작업, 혼수작업, 변형의식작업이나 정신병작업, 관계작업,그룹작업, 동작과 무용, 환상과 신화가 함께하는 꿈작업이다. “세계현세작업”의 응용과 적용은 조직 개발, 다양성 문제, 사회 운동, 세계 계획, 갈등과 분쟁의 관리 분야등에서 쓰여지고 있다. 끝으로, 종교와 신비주의 탐구, 극과 곡예 뿐만 아니라 과학의 융합, 정치연구에도 적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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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근본적 목표는 어느 개인이나 사건에서 나타나는 알아볼 수 있거나 포착하기 어려운 신호나 징표에 따라서 다오(道)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과 그룹을 존중하며, 사건의 꿈세계단계와 본질단계를 탐색하는 것을 의미한다. 꿈세계단계나 본질단계속에서의 탐색과 통찰은 종종 추적될 수 없는 상황의 것에도 놀라울 해결책이나 해소를 가져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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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적 기법*
다른 학파나 학문의 기존 작업방식이나 기법을 존중하는 것 이외에도 프러세스 웤의 모든 기초적 기술은 ‘알아차림’에 있다. 몸 안에서 느껴지고 있는 것을 포함, 다음과 같은 것을 주시하여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1. 반복될 수 있는 합의의 신호나 징표
2. 현묘하고 몽롱한 신호나 느낌
3. “순간순간 우리의 주의를 끌거나 ‘희롱’하는 것,” 어렴풋하고 반복할 수 없는 신호나 표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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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짐의 기법-매타스킬(태도, 인생관, 철학관)
애이미 민댈 박사(Amy Mindell)는 그녀의 저서 ‘Metaskills; The Spiritual Art of Therapy’ 에서 ‘매타스킬 (Metaskill)’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심층의 정신적 태도와 철학적 신념은 쎄라피와 일상생활에 나타난다….정신요법자들은 그들의 생활 태도에 그들 삶의 근본적 신념을 표현한다. 그런 태도는 그들의 태크닠에도 스며나와 남과 다른 두드러진 태크닠을 만들고 있다. 그녀는 개념적으로 이런 중요한 밑에 깔린 정신요법자의 태도들이 반드시 연구되고 또한 연마되어야만 하는 기법으로 들어 올린다. 이런 “근저의 태도” 를 매타스킬이라고 한다. 심연하고 계속되는 모든 치유나 수련작업에 있어서 중요한 매타스킬은 우리자신과 다오(道), 즉 관찰이나 직감/관 으로 아는 것을 따르는 것이다. 프러세스 웤의 신비성은 우리가 뭐라 형용될 수 없는 것을 따르면서, 한편으론,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부분이 주시되는 신호나 징조, 이러한 신호들이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뜻을 알아내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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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프러세스 웤에서 쓰고 있는 용어들은 같은 말이라도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개념과 많이 다르다. 이러한 용어의 특수적이고 전문적인 개념등은 제이 르바 (Jay Revar)의 프러세스 웤 용어사전*이나, 다음 문헌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노자의 도덕경(Tao Te Ching), 애이미의 매타스킬 (Metaskills), 아니의 리버스 왜이 (River’s Way), 콴텀 마인드 (Quantum Mind). 라오쯔 출판사 (www.laotse.com)를 통해 팦(POP) 매거진, 많은 다른 저자들의 책과 기사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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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력
21세기 초창기에 들어선 현시점에서 우리가 보는 피떠블유 모습은 세계 각 처에 있는 원주민들과 현대인들과의 접촉에서 뿐만 아니라, 아니(Arny)의 MIT 연구 시절, 쮸맇에 있는 융 대학원 시절, 애이미(Amy)의 앤티옼 대학교이후 유니온 대학원시절에서 부터 자라 나왔다. 지금까지의 일은 충실했다고 보나, 우리의 국적, 교육, 피부색, 인종, 나이, 성적 경향, 건강등으로 제한되었다고 본다.
피떠블유의 선조들(뿌리가 되는 사상)
도가사상; 도덕경과 역경
무속신앙; 특히 아프리카 동해안, 캐나다 서부해안, 남서부 호주 지역의 특정 개인이나 그룹의 문화
세계의 종교 영성계, 스와미 묵다난다, 불교의 여러종파, 특히, 일본 선종의 대사 케이또 후쿠시마.
사회운동가들; 마핱마 간디, 마틴 루터 킹, 죤 앨 죤슨, 민주주의와 모든 존재의 평등성을 지지하는 여러분.
씨 지 융(C.G. Jung)의 업적, 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 제이콥 모레노 (Jacob Moreno), 씨그먼드 후로이드 (Sigmund Freud), 스탠 그로프 (Stan Grof), 융심리학자 (the Jungian), 인본주의자 (Humanistic), 궤슈탈트 (Gestalt), 초월심리학 (Transpersonal), 분쟁해소집단(Conflict Resolution communities)
과학과 의식 연구방면; 특히 물리학의 어윈 슈로우딘져(Erwin Schroedinger), 대이빋봄 (David Bohm), 휴 에버렡 (Hugh Everett), 리챠드홰인맨(Richard Feynman), 애드윈 태일러(Edwin Taylor)
세계의 꼭두인형제작자, 예술가, 미술가, 무용가, 시인, 음악가
많은 개인과 그룹들:
프러세스 웤 이론과 실제는 그룹의 일치 합의와 다양한 문화속에서 계속 검색하고, 그 응용된 것에 적응하고, 또 그것을 발표하신 여러분 덕택으로 창조 진화되어 왔다. 특히 저희 스승들이신 벤 톰슨 (Ben Thompson), 프랜즈 리클린 (Franz Riklin), 바바라 하나 (Barbara Hannah)께도 감사하고, 그간 우리를 많이 가르쳐 준 피떠블유 생도들과 수련원 여러분께도 감사하며, 공동으로 탐구하고, 싫어하고, 사랑하고, 이해하는 세계를 만드는 전 프러세스 웤 집단 지역사회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더 많은 초학문적 그리고 초문화적 발견과 확대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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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수련연구소와 개인 연락처
포트란드 프러세스 웤 쎈타(Process Work Center of Portland)의 왭 링크와 글로블 포탈에 가시면 (http://www.processwork.org/additionalsites.htm) 다른 차원의 교육훈련과 적용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연구소와 연락망으로 안내됩니다. 그 외에도 왭 연락망에 올려져 있지 않은 프러세스 웤 지역사회의 호우들이 세계 각 처에 많이 있읍니다.
한나(Hanna) 정 능희
8/22/2004

양자심리학 : 심리학과 물리학의 경계 저 : 아놀드 민델

양자심리학 : 심리학과 물리학의 경계

저 : 아놀드 민델
역 : 양명숙, 이규환
출판사 : 학지사
발행일 : 2011년 03월30일



출판사 서평

이 책은 알아차림의 과정과 실재를 창조하는 데 참여하는 신비한 능력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관찰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하는 우리의 지각에 대한 배경으로 자연이 자신과 상호작용하는 미묘한 방식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저자인 민델 박사는 우리 누구나 일상적 실재(Consensus Reality)와 비일상적 실재(Non-Consensus Reality)를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들의 현실인 CR에서 검증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점점 원초적으로 타고난 감각을 잃어버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민델 박사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래 타고난 자연적인 본성으로 돌아가 일상적인 실재인 CR과 비일상적인 실재인 NCR을 잘 통합할 수 있는 감각을 찾는다면, 현재보다 훨씬 더 균형 있고 조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펼쳐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양자 마음을 통하여 심리학과 물리학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만날 수 있다. 고정된 우리의 편견을 열고, 일상적 실재인 CR과 비일상적 실재인 NCR이 바로 통합될 수 있는 양자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이 지구는 살아 있는 인격체인 우리 자신이며, 우리 자신들이 또한 이 지구라는 관점에서 세상은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목차

역자 서문
저자 서문

제1부 수학에서의 의식

01 미지세계에서의 물리학
02 헤아리는 것과 헤아리지 않는 것
03 수학에서의 도(道)
04 꿈꾸기의 수학
05 함께 만들어 가는 우리의 우주
06 수의 장과 신성한 게임들
07 허수의 알아차림
08 켤레화(化)는 선명한 꿈꾸기를 의미한다
09 파울리 꿈과 하나의 세계
10 자연의 죽음의 역사
11 미적분학과 깨달음

제2부 자의식적 양자역학

12 뉴턴의 법칙과 초자연치료
13 이론들에 대한 이론
14 이중틈새실험
15 켤레화와 꿈꾸는 시간
16 불확정성과 관계
17 양자 신호교환
18 평행한 세계
19 비국소성과 우주 마음

제3부 상대성에서의 도(道)

20 상대성의 심리학
21 질병의 끝
22 형태변형과 초공간
23 아인슈타인의 시간으로부터의 분리
24 빛과 명료함
25 시공간과 비밀의 강
26 신성한 기하학- 어둠의 구조
27 융의 마지막 꿈- 동시성
28 굴곡과 2차적 주의집중
29 빅뱅과 블랙홀
30 사람이 비밀 통로다
31 절정 경험-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32 에너지 탐색
33 원자력 에너지와 가상 입자
34 무(無)에서의 창조
35 물리학에서의 과정이론
36 자기 반영의 우주

제4부 심리학은 자의식적 물리학이다

37 대칭과 의식
38 드림바디- 두 종류의 죽음
39 드림워크- 꿈 안내로서의 마음
40 바디워크- 질병과 엑스터시 사이에서
41 월드워크- 역사를 바꾸는 방법
42 플래닛워크- 여섯 번째 대 종말
43 기도에 대한 응답

부록 - 의식에 대한 수학적 패턴
파동에 대하여
목말 타기
양자역학과 파동 진폭
양자역학의 원리
수학에 의해 패턴화된 심리적 경험
양자물리학에서 꿈꾸기까지
일상적 실재 CR
의식- 일반 원리

참고문헌




저자소개


아놀드 민델(Arnold Mindell) [저]


아널드 민델 박사는 현존하는 세계적인 석학으로 MIT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스위스의 취리히 융 연구소에서 전문 자격과정을 이수하였으며, '과정지향 심리학(Process Oriented Psychology)'의 창시자다. 현재는 'Process Work Center'를 중심으로 미국 오리건 주의 포틀랜드와 세계 각국에 센터를 두고 활동하고 있다.
민델 박사는 혁신적인 꿈의 통합, 바디워크, 융의 분석 치료, 집단 과정, 의식 연구, 초자연치료, 양자 물리학 그리고 크고 작은 집단 갈등 해결 등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저서로는 [드림바디(Dreambody)] [무예가로서의 지도자(The Leader as Martial Artist)] [불에 앉아 있기(Sitting in the Fire)] [양자심리학(Quantum Mind)] 등이 있다.
과정지향 심리학 기초과정 시리즈는 1985년부터 1992년 사이에 저술되었다. 여기에는 [꿈꾸는 영혼(Working with the Dreaming Body)] [관계치료- 과정지향적 접근(The Dreambody in Relationship)] [말 거꾸로 타기(Riding the Horse Backwards)] [명상과 심리치료의 만남(Working on Yourself Alone)]이 있다. 이 책들은 과정지향 심리학에서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것이 서술되어 있다.
이외에도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이는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현재에도 번역 중에 있다.

2014년 8월 19일 화요일

요시미 순야 -대학이란 무엇인가

“포스트 국민국가 시대의 새 ‘리버럴 아트’는 어떤 모습일까”
일본 석학이 말하는 ‘대학이란 무엇인가’
2014년 06월 02일 (월) 12:22:10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자본주의가 석권한 이 시대에 대학에서 ‘교양주의’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교양’을 부활시키는 일이 아니라 ‘대학’을 다시 정의하는 일이다.”

대학 설치기준 간소화, 교양교육의 붕괴, 대학원 중점화, 국립대학의 법인화, 저출산에 따른 대입 정원의 과잉과 대학생의 학력저하, 신진 연구자의 불안정한 지위, 세계화와 그로 인한 유학생의 증가.
한국 대학의 이야기가 아니다. 1990년대 이후 일본 대학가의 풍경이다. 한국 대학의 모습과 많이도 닮았다. 이런 급격한 대학환경의 변화는 대학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요시미 순야 도쿄대 부총장 
 
요시미 순야 도쿄대 부총장(57세·사진)이 지난 2011년에 쓴 『대학이란 무엇인가』(글항아리, 2014)가 번역돼 나왔다. 향후 10년 동안 16만 명의 대학 입학정원을 줄여 나가자는 교육부의 ‘대학구조개혁’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는 현실에서 미래의 대학을 구상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하다.
요시미 부총장은 사회학과 도시론, 미디어론, 문화연구 분야에 천착해 온 세계적인 석학이다. 현재 도쿄대 대학원 정보학환 교수로 있으며, 신문사 이사장, 대학종합교육연구센터장, 교육기획실장, 대학사료실장 등을 겸하고 있다. ‘정보학환(情報學環)’이라는 소속이 낯설다. 이곳은 도쿄대가 법인화되면서 기존에 존재하던 조직을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정보와 관련된 문과와 이과의 대학원을 통합하며 만들어진 조직이라고 한다. 그가 일본에서 제기하고 있는 대학론을 들어 본다.
요시미 교수는 “최근 수십 년에 걸쳐 일본 사회에서 ‘대학’이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대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빠뜨린 채 논의가 진행됐다”라고 일본의 사정을 전했다. 요시미 교수는 지금, 진정 필요한 것은 ‘대학’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정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가 석권한 이 시대에 대학에서 ‘교양주의’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교양’을 부활시키는 일이 아니라 ‘대학’을 다시 정의하는 일이다.” 과거와 같은 ‘교양’의 부흥으로 회귀되지 않는 포스트 국민국가 시대의 지적 공간으로서 미래의 대학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요시미 교수는 이 책에서 대학을 ‘미디어’로 본다. “도서관이나 박물관, 극장, 광장 그리고 도시가 미디어인 것처럼 대학 역시 하나의 미디어다. 미디어로서의 대학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지식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매개한다. 그 매개의 기본 원리는 ‘자유’다. 바로 이 때문에 근대 이후 같은 ‘자유’를 지향하는 미디어로서 출판과 대학은 싫든 좋든 복잡한 길항적 제휴 속에서 관계를 맺어 왔다. 중세에는 도시가 미디어로서의 대학의 기반이었고, 근대에 와서는 출판이 대학 바깥에서 발달했으며, 국민국가 시대에 양자는 통합됐다. 그리고 지금 출판의 세계로부터 인터넷의 세계로 급격한 이행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미디어로서의 대학의 위상도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요시미 교수는 대학을 주어진 교육제도로서 파악하기 전에 지식을 매개하는 집합적 실천이 구조화된 장인 ‘미디어’로 이해한다. 요시미 교수는 “대학을 이렇게 재정의함으로써 대학을 둘러싼 오늘날의 문제점을 타개할 실마리를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이런 시도를 통해 ‘대학’에 대한 질문의 사정거리는 크게 확장되리라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인터넷이 전면화된 미래 사회에서 캠퍼스와 교실, 학년제와 다수의 전공 교원을 갖춘 대학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요시미 교수는 모든 지식을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검색할 수 있으므로 더 이상 대학은 필요 없다는 비관론에 오히려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요시미 교수의 진단을 더 들어 보자. “대학교수의 강의나 토론의 중요성은 남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대학교수에게 이를테면 마이클 샌델과 같은 ‘백열’ 강의가 가능한 것은 아니며, 애플사는 이미 세계 유수 대학의 양질의 강의를 ‘아이튠스 유’라는 형식으로 연결해 아이패드와 같은 차세대형 휴대단말기로 제공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이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구글이나 애플, 페이스북과 같은 새로운 인터넷 지식 시스템을 마주해 대학이라는 상대적으로 낡은 지식 형성의 장이 무엇을 자신의 고유성으로 삼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때가 오고 있다.”
그는 오늘날 대학이 처한 어려운 상황의 배후에 있는 가장 큰 역사적 변화는 국민국가의 퇴조를 꼽는다. 대학은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에서 글로벌한 관료제적 경영체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대학은 ‘자유로운 이성’을 위해 국가와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수월성의 셈법이 지배하는 대학에서 세계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질문이 효력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보다 신경을 써야 한다.”
대학이란 ‘자유’를 향한 의지다. 그러나 그 자유의 조건은 시대와 더불어 변화한다. 오늘날 대학은 이미 자본주의 바깥에 있는 비평가가 아니라 자본의 순환시스템을 담당하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이제는 발견이나 개발만이 아니라 관리에도 주력하는 다양한 새로운 전문지식과 새로운 리버럴 아트 사이의 긴장감 있는 관계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 요시미 교수의 생각이다. 포스트 국민국가 시대의 새로운 ‘자유=리버럴’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요시미 교수가 말하는 ‘미래 대학’의 구상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이 책을 번역한 서재길 국민대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옮긴이의 말’에서 조금은 더 구체적인 미래 대학의 상을 보여 주었다. 요시미 교수가 현재 진행 중인 과제는 첫째, 20세기 일본과 아메리카니즘, 둘째 MALUI 제휴와 디지털 지식 기반, 셋째, 20세기 동아시아문화사 쓰기라고 한다. Museum, Archives, Library, University, Industry의 이니셜을 딴 MALUI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 지금까지 공공적 아카이브를 구축해온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문서관, 자료관, 필름센터, 방송 프로그램 아카이브 등의 기관과 대학, 산업체가 제휴해 새로운 형태의 아카이브를 정비하는 작업을 통해 디지털 사회의 지식 기반을 구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정보학환’이라는 학제적 연구기관과 MALUI라는 영역 횡단적 네트워크가 요시미 교수가 구상하고 있는 새로운 대학의 모습을 구현하려는 노력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서 교수는 “대학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보려는 어떠한 시도와도 결별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자 매력”이라고 말했다. 서 교수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느낀 점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사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고등교육의 모습과 대학상이 어떠한 것인지, 대학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사회적인 합의를 찾기 위한 진지한 논의를 제대로 한 적이 없다. 과거의 대학으로 회수되지도 시장과 자본에 종속되지도 않으면서 사회 구성원의 공공재로서의 대학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이 책의 주장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문제제기가 아닌가 한다.”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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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3일 수요일

선진유학에서 존재론

선진유학에서 밝히고 있는 존재론적인 근거임을

오늘특히더 수퍼한 수퍼수구리 | 2014/06/29 03:33 | 그밖의것들
근거
정역에서는 중위정역에서의 중은 서경의 궐중지도의 중임을 밝히고 있다.
중용의 시중지도의 중이다.
그리고 위는 포오함육 십진일퇴지위의 위이다.
그리고 하도낙서가 선진유학에서 밝히고 있는 중정지도의 존재론적인 근거임을 언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