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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30일 토요일

성性-북송의 성설性說

성性-북송의 성설性說 致知
2010/07/23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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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마 쓰요시 지음, 신현승 옮김, <2. 성性- 1.북송北宋의 성설性說>, <<송학의 형성과 전개>>, 논형, 2004.

p.96
육구연은 생애의 대부분을 고향인 무주撫州에서 보냈다. 무주에서는 육구연보다 백 년 정도 이전에 북송을 대표하는 사상가를 배출하였는데, 그가 왕안석이다. 남송에 이르러 도학파를 중심으로 왕안석 비판의 풍조가 높아지고는 있었지만, 왕안석은 의연하게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 존재가 얼마나 컸음을 느끼게 했던가는 왕안석 비판자인 주희가 <<주자어류朱子語類>> 속에서 빈번하게 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사실로부터도 역설적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육구연에게 <형국왕문공사당기荊國王文公祠堂記>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象山先生全集>> 권19) 이 문장이 쓰여진 것은 주희와 논쟁을 전개하고 있는 순희淳熙 15년(1188)의 일이었고, 그 문말文末의 표기는 <방인육모기邦人陸某記>로 되어있다.
육구연의 왕안석에 대한 평가는 호안국이나 주희에 비교해보면 상당히 부드러운 편이다. 그는 왕안석에 대해서 인격에 관련된 공격은 전혀 하지 않았다. 왕안석의 개혁의 잘못은 정치의 요체를 법으로 추구했다는 점에 있었다.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몸(身)에 의한다. 그 몸을 수양하는 것은 도道에 의하고, 도를 수양하는 것은 인仁에 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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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인이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은 정치의 근본이고 몸은 사람의 근본이며 마음은 몸의 근본이다. 근본을 정확히 하지 않고 말末에만 구애되어서는 말末조차 다스릴 수가 없게 된다.
마음을 핵심의 자리에 고정시킨 평소의 지론이 설명되고 있다. 순희 2년(1175)의 <경재기敬齋記>는 "옛날의 사람이 그 몸을 가家·국國·천하天下로 정확히 미치게 하였던 것은 그 본래의 마음(本心)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시작된다. 천자千字에 조금 못미치는 짧은 문장 속에 '심心'이라는 글자가 열세 번 등장하고 확실히 '심학'의 선언문의 취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연보 13세 때의 조문에는 '우주야말로 내 마음, 내 마음이야말로 우주'라고 말한 것이 보이고, 육구연에게 있어서의 마음의 문제가 유소년기 때에 이미 깨달음의 단계에 도달한 것 같이 묘사를 하고 있다. 육구연은 마음의 학문(心學)이라고 하는 평가는 이미 일찍부터 정해져 있었다. 왕수인이 '성인의 학문은 심학이다'라고 해서 육구연을 재평가하고 스스로 그 계보를 이어 받은 자로서 자임했던 것도 뚜렷한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심학'의 대극에 위치한 '성리학性理學'자 주희도 심이라는 용어에 유달리 주의를 기울인 사상가였다. 단지 주희의 경우에는 장재張載의 '심心은 성性과 정情을 통합한 것'이라는 규정에 전면적으로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문제는 항상 성이나 정의 구별을 둘러싼 의론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바로 그것이 일반적으로 심성론心性論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이다. 그리고 맹자의 성선설에도 전면적으로 의거하기 때문에 선善으로서의 성性이 어째서 그대로 발현되지 않고 이 세상에 악惡을 초래하는가라는 악의 기원을 논하는 것이 심성론에 요구되었다. 하지만 맹자의 성선설은 송대 이전에 결코 정론이었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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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북송에서 맹자를 세상에 널리 알린 제일인자는 왕안석이었다. 그에게는 <원성原性>이라는 제목의 문장이 있는데(<<臨川先生文集>> 권68), 어떤 사람이 맹자孟子·순자荀子·양웅楊雄·한유韓愈의 성설이 서로 다른 이유를 질문하다고 하는 상정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 제명 및 그 첫머리부터가 한유의 동명同名의 문장(<<韓昌黎문집>> 권1)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유는 맹자의 성선설, 순자의 성악설, 양웅의 선악이 뒤섞인 성설을 열거하고 자신의 견해로서 성삼품설性三品說을 제창하였다. 한유의 이 문장이나 <원도原道> 말미의 기슬에 의해 ... 북송에서는 공자의 뒤를 계승하는 대학자로서 이 네 사람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 통례였다. 왕안석의 <원성>에서도 질문자는 이 네 사람은 모두 '옛날에 도道를 갖추고 있던 어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이 다른 것은 어떠한 이유였을까라는 형태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왕안석은 자신이 의거하는 것은 공자의 주장뿐이라고 대답한 뒤, 네 사람의 주장에 각각 비판을 덧붙여 간다. 먼저 한유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을 성 그 자체로 간주하고 있는 점에서 잘못되어 있다. 성이란 이러한 오상의 '태극太極', 즉 근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오상과는 구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으로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을 한 쌍의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어느 쪽이나 모두 선인가 악인가라는 성격규정을 성에 대해서 행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 선악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정의 위상 문제에 달려있는 것이고, 성 그 자체에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情 또는 습習의 위상을 성으로서 논하고 있다. 양웅의 주장도 성이 아니라 습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p.99
다. 그리고 공자가 "본성(性)은 서로 가까운 것이지만, 습관(習)이 서로를 멀어지게 한다"(<<論語>> 陽貨)라고 서술한 것이야말로 자신의 견해라고 한다. 즉 성에는 선험적인 시비是非나 선천적인 차이는 보이지 않고 그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성이 원인이 되어 구체적인 형태로서 발현한 상태·단계라고 하는 것이다.
<성설性說>(<<臨川先生文集>> 권68)은 <원성>의 속편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내용을 갖추고, 공자의 위의 말과 상지上智·중인中人·하우下愚라고 하는 인간 유형과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한유가 제시했던 바와 같은 성삼품설이란 결국 습관에 의해 나누어진 것이고, 하우라고 하더라도 선인善人이 될 소질은 갖추고 있는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성은 누구라고 선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양맹楊孟>(<<臨川先生文集>> 권64)에서는 맹자와 양웅의 서로 다른 점을 개념의 내용규정이 서로 빗나가 있는 점에서 찾고 있다
맹자가 말하는 성이란 올바른 본성만을 가리키고 있다. 양웅이 말하는 성은 본성의 올바르지 않은 부분을 합쳐서 가리키고 있다. 양웅이 말하는 명命은 올바른 명만을 가리키고 있다. 맹자가 말하는 명은 명의 올바르지 않은 부분을 합쳐서 가리키고 있다. ... 지금의 학자들은 맹자 측에 가담해 있으면 양웅을 비판하고 양웅 측에 가담해 있으면 맹자를 비판한다. 그것은 문자의 표면만을 이해한 것뿐이고 거기에서 지시하는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성이나 명의 도리道理를 분별하고 있다고 스스로 일컫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성정性情>(<<臨川先生文集>> 권67)에서도 세간에서 통설로 되어 있는 '성은 선하고 정은 악하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그것이 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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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문장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서 유래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맹자의 성선설이란 성이 무조건 언제나 선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에는 악으로 향하는 요소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양웅도 사람의 성에는 선과 악이 뒤섞여 있다고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왕안석은 맹자의 주장을 기본적으로는 시인하고 그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서 양웅을 증거로 인용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결국 그의 견해에 의하면 맹자나 양웅도 말하려고 했던 것은 동일한 것이고, 그것은 공자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한다-결국은 왕안석 자신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다만 그 설명방법에 약간의 문제가 있어 정이라고 해야 할 것을 성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해에 혼란을 초래하였다고 파악하는 방법이다.
북송에는 사마광에 의해 대표되는 맹자 비판세력이 존재하였다. 사마광에 의하면 공자의 교설은 명名을 바로잡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고 맹자는 그 가르침으로부터 이탈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 <의맹疑孟>(<<增廣司馬溫公全集>> 권101) 속에서 사마광은 맹자의 고자告子에 대한 반론을 다시금 논박하고 있다. 고자가 물의 흐름에 비유하여 성에 본래는 선악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에 관해 그 비유는 중인中人에 관해서만 들어맞는 것뿐이고, 한편으로는 확실히 타고난 선인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도敎導할 방법이 없는 악인도 있으며, 맹자가 말하는 바와 같이 누구에게도 성선性善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마광은 기본적으로는 성삼품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소식은 <맹자변孟子辯>에서 성 그 자체에 선악은 없다고 서술하고 맹자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덧붙여 왕안석과 마찬가지로 <<주례>>에 근거하여 정치의 실현을 구상한 이구는 <상어常語>에서 맹자가 춘추오패春秋五覇*의 업적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 있는데,
(* 춘추오패: 중국 춘추시대에 가장 강대하여 한때의 패업을 이룬 다섯 사람의 제후. 곧 제 환공·진 문공·진 목공·송 양공·초 장왕, 또는 진 목공·송 양공 대신에 오 부차·월 구천을 넣기도 한다.)
p.101
그것은 공자의 의도에 반한다고 비난하고 있다(여윤문余允文의 <<존맹변尊孟辯>>에 의거함).
그 중에서 왕안석은 맹자의 옹호파이고, 그는 맹자의 성선설을 완벽하다고는 말하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수긍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에서의 맹자 성선설의 현창顯彰은 정호·정이에서 시작되는 도학계 학자들의 것과 공통의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개혁의 일환으로서 과거의 시험과목을 변경하여 당대唐代 이래로 중시되어 오던 시부詩賦를 시험과목에서 제외하고, 그 대신에 책策(시사문제에 관한 대책)과 논論(역사 비평)을 중시하였다. 경학에 관해서는 경문·주석의 암기가 아니라 내용의 이해를 묻고 그 자신이 '단란조보斷爛朝報'**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했다고 하는 <<춘추>>를 빼버리고, 그 대신에 <<주례>>를 넣은 오경五經을 '본경本經'이라고 부르고 이 중에서 선택하게 한 것 이외에, '겸경兼經'이라는 명칭 하에 <<논어>>와 <<맹자>>를 모두 과거의 필수과목으로 삼았다. 결국 <<맹자>>는 이러한 계기를 시작으로 하여 경서로서의 취급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과거시험의 개혁에 관해서는 도학계의 인사들도 <<주례>>를 <<춘추>>로 돌려버렸다는 것 이외에는 왕안석의 개혁을 기본적으로는 답습하였다. 이러한 신학 및 도학의 맹자 현창에 의해, 예를 들면 남송 말 진진손陳振孫의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에서 <<맹자>>는 자子가 아니라 경經으로 분류되고 <경록經錄>에 <어맹류語孟類>로서 <<논어>>와 병칭되기에 이른다.
(**단란조보: 여러 조각이 난 조정의 기록이란 뜻. 왕안석이 <<춘추>>를 헐뜯으며 한 말. 왕안석은 처음에 스스로 춘추를 주해하여 천하에 펴려고 했으나, 이미 손신로孫莘老의 <<춘추경해春秋經解>>가 나왔고, 그와 견줄 수가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춘추를 헐뜯어 이를 폐하고, '이것은 단란조보'라고 한 고사.)
이보다 먼저 경덕景德 2년(1005)에 칙명에 의한 사업으로서 당의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증보하는 형태로 소疏가 간행되었는데, 그것은 전부 열두 개의 경서로 이루어져 있었다-경학상 엄밀하게 말하면 춘추삼전은 철저하게 전이고 경은 아니지만, 여기에서는 다른 것과 똑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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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라고 부르기로 한다. 즉 <<오경정의>>의 다섯 가지 서적-<<주역>>, <<상서>>, <<시경>>, <<예기>>, <<춘추좌씨전>>-과 <<주례>>, <<의례>>,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효경>>, <<논어>>, <<이아爾雅>>이다. 여기에 <<맹자>>가 덧붙여지면 오늘날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불러서 익숙해져 있는 <<십상경주소十三經注疏>>가 갖추어지는 것이지만, 이 시점에서 <<맹자>>는 아직 경서라고 간주되고 있지는 않았다. <<심상경주소>>에 들어 있는 <<맹자>>의 소疏는 경덕의 사업에 참가한 학자의 한 사람인 손석孫奭의 이름을 위에 붙이고 있지만, 이미 주희가 지적한 바와 같이 남송 초기의 사람에 의한 위작이다.
서적 목록에서도 조공무晁公武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나 <<송사宋史>> 예문지藝文志에서는 여전히 경부經部가 아니라 자부子部에 들어가 있다. ...
신학이든 도학이든 맹자를 현창하는 최대의 이유는 인의를 사람의 본성이라고 하는 소위 성선설에 달려 있었다. 당시 왕성하게 논의되었던 성론性論 속에서 그들은 맹자의 주장을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그때 필연적으로 본성과 마음의 관계를 논의의 과정 속에 포함시키게 되었다. <<맹자>>에 자주 나오는 마음에 관한 발언, 그리고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본성을 안다. 그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로 시작되는 진심편盡心篇 첫 장의 논리 등이 초점이 된다.
<<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 권1에 수록되어 있는 정호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주희에 의해 <<근사록近思錄>> 권1에 재차 수록되어 있다.
태어난 그대로를 본성(性)이라 한다. 본성은 곧 기氣이며, 기는 곧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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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이것을 생生-태어난 그대로-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태어나면 기품이 있고 도리(理)에는 선과 악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본성의 안에 본래부터 선과 악이 있는 것이고, 서로 대립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선한 사람이 있고, 어릴 때부터 악한 사람도 있다. 이것은 사람에게 기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선은 물론 본성이지만 악도 또한 본성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정호의 주장이 뒤에서 서술할 정이·주희의 그것과는 그 취지를 달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기품 이전의 본성 그 자체에 관해서는 이것을 선인가 악인가로 논할 수 없다는 견해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왕안석과 일치하기는커녕 여윤문余允文에 의해 맹자 비판파로 분류되고 있는 소식의 주장과도 아주 닮아 있다. 본성이란 사람의 태어난 그대로의 것이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맹자의 논적인 고자告子의 논법이었다. 본성을 선악을 뛰어넘는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이러한 사고 방식은 지금부터 살펴보는 바와 같이 도학계열에서는 호굉의 <<지언知言>>이나 장구성張九成의 <<맹자전孟子傳>>으로 계승되고, 이윽고 양명학陽明學의 무선무악론無善無惡論에서 그 면모를 일신하여 부활하게 된다.
그것은 주희의 용어를 가지고 설명하면 그들이 본성(性)이라는 개념을 <<중용>>에서 말하는 바대로 미발未發 단계에서의 마음 상태로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발의 성에 대하여 이발已發 단계의 상태는 정이라고 불린다. 정호는 그것을 기氣에 의한 것으로서 설명하였다. 왕안석이든지 정호이든지 간에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선악은 이 단계에서 밖에 사용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뒤에서 서술하겠지만 주희 자신은 이러한 방식으로 성과 정을 구별하고 있다. 그리고 주희 이후에도 왕안석이 부정했던 바의 성선정악설性善情惡說에 대한 약간의 수
p.104
정이 한때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렇게 파악하는 방법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쉬웠고, 바꾸어 말하면 그들의 생활감각에 익숙해지기도 쉬운 도식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마음에 관하여 호굉 등이 이발이 단계에, 장구성 등이 미발의 단계에 귀착시키는 것에 대하여 주희는 장재의 주장에 근거하여 새로운 심성론을 이른바 주자정론朱子定論으로서 주장하게 된다. 

인물성동이논쟁-인간과 만물의 차별성에 대한 검토

인물성동이논쟁-인간과 만물의 차별성에 대한 검토 致知
2010/03/1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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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찬, '인물성동이논쟁-인간과 만물의 차별성에 대한 검토',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5.


1. 논쟁의 발단과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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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주 만물의 발생과 변화는 리와 기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조선 초부터 인간의 성정에 관심을 기울이고 심성의 올바른 발현을 통해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조선 성리학자들은 인간의 성정이 우주만물 사이에서 어떻게 구성되고 현실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관해 이미 깊은 탐구를 해 왔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성과를 사단칠정 논쟁이라 부른다.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다른 동물들과 달리 사회 규범을 가지고 이를 실천해 나갈 수 있다고 할 때, 이제 시야를 인간의 성정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 쪽으로 확장시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자연스런 일이라 할 수 있다. ...
p.206
인간이 왜 동물과 같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일반적 관심이라면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비롯한 성리학자 대부분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인성과 물성의 차이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관심은 사계 김장생, 우담 정시한, 외암 이식, 농암 김창협 등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아무래도 본격적인 논의의 시작은 수암 권상하의 문하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권상하는 이이-김장생-송시열의 뒤를 이어 기호 학파의 맥을 계승하는 사람이다. 그 문하에는 인물성동이 논쟁의 주인공이 되는 외암 이간과 남당 한원진이 있었다. 한원진은 1705년 지은 '시동지설示同志說'에서 인물성론에 관해 이미 상당히 정리된 입장을 밝히고 있고, 이간은 1709년 최성중에게 보내는 편지('與崔成仲')에서 오상과 미발의 관한 논의를 한 바 있다. 즉 1712년에 본격적인 논쟁을 벌이기 이전에 이미 이들은 자기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토론은 1712년 이간이 스승 권상하에게 미발 상태의 순선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된다.
처음에 권상하는 이간의 설에 수긍하였으나, 한원진이 자기의 의견을 설명하자 이번에는 한원진의 설을 인정하였다. 그러자 이간은 스승 권상하에게 편지를 보내 스승과 한원진의 설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한원진은 스승을 대변해서 다시 이간을 반박함으로써 이들 둘 사이의 논쟁은 본격화되었다. 이간은 '리통기국변'(1713), '미발유선악변'(1713), '미발변'(1714), '오상변'(1714)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발변후설'(1719)을 썼다. 그리고 한원진은 '부미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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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변'(1715), '부기질지성변증'(1715) 등을 쓰고, 1724년에는 이간이 권상하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종합적인 변론을 담아 '이공거상사문서변'을 지어 자신의 입장을 마무리하였다.
이들의 논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집단적 논쟁의 성격을 띠면서 조선조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이간이나 한원진은 모두 권상하의 문인들로서 기호지방(충청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후 이간의 설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주로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 계열을 잇는 기원 어유봉, 도암 이재, 여호 박필주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서울에 사는 노론 낙론 계열이었으므로 이들의 이론을 낙론洛論(洛下, 즉 서울 부근)이라고도 한다. 한편 권상하와 한원진의 이론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병계 윤봉구, 매봉 최징후, 봉암 채지홍 등 주로 충청도 근방에 살았기 때문에 호론湖論(湖西, 즉 충청도)이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이들 사이의 논쟁은 '인물성동이론'이라는 명칭 이외에 '호락논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2. 논쟁의 전개

1. 성 개념의 다의성

성리학에서의 성이란 인간 또는 사물 안에 내재된 리를 가리킨다. 성은 구성상으로는 '기 안의 리'(氣中之理)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p.208
보는 관점에 따라 두 가지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동론同論을 주장하는 측과 이론異論을 주장하는 측이 이용하는 논거를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이간은 "중용"의 '천명지위성'에 대한 주희의 주석을 동론의 근거로 든다. 주희의 주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명命은 령令과 같고, 성性은 곧 리理이다. 하늘이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써 만물을 화생化生하게 함에, 기氣로써 형태를 이룰 때에 리理 역시 부여되니 마치 명령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에는 각기 부여된 리를 얻어 건순오상健順五常의 덕德으로 삼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성性이다. ("中庸章句", '天命之謂性'의 朱子註: 命, 猶令也. 性, 卽理也. 天以陰陽五行, 化生萬物, 氣以成形而理亦賦焉, 猶命令也. 於是, 人物之生, 因各得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所謂性也.)
만물이 모두 리를 부여받아 기로써 형태를 이루고, 이 때 각기 부여된 리가 곧 성이 되므로, 인간을 포함하는 만물의 성이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원진은 "맹자집주"와 "대학혹문"에서 나오는 주희의 글을 논거로 사용한다. "맹자집주"에서 주희가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성性이 없을 수도 없고 기氣가 없을 수도 없다. 그러나 기氣로써 말하면 지각 운동에서는 인간과 사물에 다름이 없는 듯 할지라도, 리理로써 말하면 사물이 어찌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온전하게 받았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성性이 선하며 만물의 영장이 된 까닭이다. ("孟子集註", '告子上', 3장의 朱子註: 人物之生, 莫不有是性, 亦莫不有是氣. 然以氣言之, 則知覺運動, 人與物, 若不異也. 以理言之, 則仁義禮智之稟, 豈物之所得而全哉. 此人之性, 所以無不善而爲萬物之靈也.)
p.209
기에는 차이가 없지만 품부받는 리가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다고 하니 인물성 이론의 논거가 될 만하다. 주희는 "대학혹문"에서 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반드시 리理를 얻은 다음에 건순인의예지健順仁義禮智의 성性을 이루게 되고, 반드시 기氣를 얻은 다음에 혼백 오장 백해의 신체를 이루게 된다. ... 그런데 그 리理로써 말하면 만물의 근원은 하나이므로 참으로 사람과 사물은 귀천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기氣로써 말하면 기氣의 바르고 통한 것을 얻으면 사람이 되고 그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으면 사물이 된다. 그러므로 귀천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大學或問", '經一章': 人物之生必得是理, 然後有以爲健順仁義禮智之性; 必得是氣, 然後有以爲魂魄五臟百骸之身. ... 然以其理而言之, 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以其氣而言之, 則得其正且通者爲人, 得其偏且塞者爲物, 是以或貴或賤而不能齊也.)
여기서도 사람과 사물의 차이를 말하고 있기는 하나, 이번에는 리는 동일하지만 기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사람과 사물의 다름이 생긴다고 한다. "중용"의 주석에 따르면 사람과 사물이 모두 천으로부터 리를 부여받아 성으로 삼기 때문에 사람과 사물의 성이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맹자집주"에 따르면 부여받은 리의 차이에 의하여, "대학혹문"에 따르면 기의 차이에 의하여 사람과 사물이 달라진다. 성이란 리가 기와 결합된 경우를 말하므로 리의 차이에 의한 것이든, 기의 차이에 의한 것이든 기와 결합된 리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리와 성의 개념을 다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주희의 혼용이 문
p.210
제된다. 만물 생성과 변화의 원리라는 의미에서 리는 우주 전체에 관통하고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는 개체 내의 리인 성도 동일하다. 그러나 각종의 사물이 유적類的 특성을 이루게 하고, 또한 각각의 개체이도록 하는 원리를 성이라 할 때 이 성은 사람과 사물에서, 나아가 각각의 개체에서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차이의 원인을 기라고 하든 리라고 하든 그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된 성 개념을 사용하는 한 인물성동이 논쟁의 전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성을 보는 관점에 따라 본원적인 리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각 부류의 유 개념 또는 개별적 특성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는 것은, 이 논쟁에 참여하는 성리학자들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문제는 그 중 어느 관점을 택하며, 굳이 그 관점을 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있다. 한원진은 성삼층설性三層說로 이를 해명하려 한다.
 리는 본래 하나이다. 그런데 형기를 초월하여(超形氣) 말한 것이 있고, 기질에 인하여(因氣質) 말한 것이 있고, 기질을 섞어서(雜氣質) 말한 것이 있다. 형기를 초월하여 말하면 태극이라는 이름이 이것으로, 만물의 리가 동일하다. 기질로 인하여 이름하면 건순 오상의 이름이 이것으로, 사람과 사물의 성이 같지 않다. 기질을 섞어서 말하면 선악의 성이 이것으로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물의 성이 또한 같지 않다. ("
南塘集" 권11, '擬答李公擧': 理本一也。而有以超形氣而言者。有以因氣質而名者。有以雜氣質而言者。超形氣而言。則太極之稱是也。而萬物之理同矣。因氣質而名。則健順五常之名是也。而人物之性不同矣。雜氣質而言。則善惡之性是也。而人人物物又不同矣。)
기질을 초월하여 말할 때는 만물의 리가 동일하고, 기질과 같이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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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서의 리인 성을 말하자면 사람과 사물의 성이 다르며, 기질과 섞여 있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모든 개체의 성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한편 이간은 '일원一原'과 '이체異體'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일원으로 말하면, 천명 오상이 모두 형기를 초월할 수 있으므로 사람과 사물에 치우침과 온전함의 다름이 없다. 이것이 이른바 본연지성이다. 이체로 말하면, 천명 오상이 모두 기질로 인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 사람과 사물 사이에 치우침과 온전함의 다름이 있을 뿐 아니라, 성인과 범인 사이에도 천차만별이 있다. 따라서 치우친 곳에서는 성명性命도 함께 치우치고 온전한 곳에서는 성명도 함께 온전하다. 이것이 이른바 기질지성이다. ("巍巖遺稿" 권7, '答韓德昭別紙': 以一原言。則天命五常。俱可超形器。而人與物無偏全之殊。是所謂本然之性也。以異體言。則天命五常。俱可因氣質。而不獨人與物有偏全。聖與凡之間。又是千階萬級。而偏處性命俱偏。全處性命俱全。是所謂 氣質之性也。)
근원으로 말하자면 만물에 다름이 있을 수 없고, 기질에 구애됨으로 말하자면 사람과 사물이 다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 다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음을 인정하므로 결국 논쟁의 쟁점은 어느 관점을 위주로 보아야 하는가에 있다. 이간은 '일원一原'의 관점을 택한다. 
본연이든 기질이든 성은 단지 리일 뿐이다. ... 성을 말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리로 바꿀 수 없고, 리를 말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성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한다면, 나의 미천한 견해가 미칠 바가 아니다. ("巍巖遺稿" 권7, '答韓德昭別紙': 本然氣質之間。性只是此理也。... 言性處。不可以理易之。言理處。不可以性釋之。則非鄙見之所及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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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곧 리이므로 일원의 관점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원진은 성을 기와 결합된 리라고 보면서 '인기질因氣質'의 관점을 택하여 인성과 물성이 서로 다름을 주장한다.
성을 말하는 자리에서는 진실로 그것을 리로 바꿀 수 있고, 리를 말하는 자리에서도 또한 그것을 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성과 리 두 글자를 함께 대비한다면 리가 같고 성이 다름은 분명하다. ("南塘集" 권11, '擬答李公擧': 言性處固可以理易之。言理處亦可以性釋之。然以性理二字。幷擧對言。則理同而性異。不可不辨也。)
리는 기와 상대되는 것이고 성은 기와 결합된 리(氣中之理)이므로 우주의 보편 원리로서의 리와 개별성 또는 유개념으로서의 성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리통기국理通氣局의 이중성

서로의 관점을 인정하면서도 의견의 대립을 이루는 양측이 공통으로 이용하는 또 하나의 논거가 있다. 그것은 이이의 리통기국설이다. ...
이이는 자신의 리통기국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리통기국은 본체 위에서 말해야 하며, 또한 본체를 떠나서는 따로 유행을 구할 수도 없다. 사람의 성이 사물의 성이 아님은 기氣의 국한됨이요, 사람의 리가 곧 사물의 리임은 리의 통함이다. 모나고 둥근 그릇은 다르나 그릇 안의 물은 동일하고, 크고 작은 병은 다르나 병 안의 공기는 동일하다. 기의 하나의 근본이란 리의 통함 때문이고, 리의 만가지로 다름은 기의 국한됨 때문이다. 본체 가운데 유행이 갖추어져 있고, 유행 가운데 본체가 있다. 이로써 생각해보면 리통기국의 설이 과연 한부분에 떨어지겠는가? ("栗谷全書", 권10, '與成浩原': 理通氣局。要自本體上說出。亦不可離了本體。別求流行也。人之性非物之性者。氣之局也。人之理卽物之理者。理之通也。方圓之器不同。而器中之水一也。大小之瓶不同。而瓶中之空一也。氣之一本者。理之通故也。理之萬殊者。氣之局故也。本體之中。流行具焉。流行之中。本體存焉。由是推之。理通氣局之說。果落一邊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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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의 리통기국설은 리의 무형무위無形無爲한 특성과 기의 유형유위有形有爲한 특성에 기초하여 리기의 불상잡 불상리한 구성 관계를 리일분수의 체계로 설명하고자 한 것이었다. 리통에 의하면 사람과 사물의 리가 동일하고, 기국에 의하면 사람과 사물의 성이 다를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물 사이의 성도 다르다. 따라서 리통에 따르면 인물성동론을 지지하게 되고, 기국에 따르면 인물성이론을 지지하게 된다. ... 그런데 논쟁의 양측은 이것을 받아들이는 관점이 서로 다르다.
율곡에 따르면 천지만물은 기의 국한됨이고, 천지만물의 리는 리의 통함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리의 통함이라는 것은 기의 국한됨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오히려 기의 국한됨에 나아가서 그 본체를 가리키면서도 기와 섞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巍巖遺稿" 권12, '理通氣局辨': 盖栗谷之意。天地萬物。氣局也。天地萬物之理。理通也。而所謂理通者。非有以離乎氣局也。卽氣局而指其本體。不襍乎氣局而爲言耳。)
p.214
이간은 일원과 이체의 구분 가운데 일원의 입장에서 리통을 이해한다. 성은 기중지리이지만 리의 온전한 성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기와 섞지 않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원진은 통과 국을 각각 리와 성에 대비시킨다.
대개 단지 성자만 말하면 통함과 국한됨은 모두 성이고, 단지 리자만 말하면 통함과 국한됨은 모두 리이다. 성과 리를 상대하여 말하면 통함은 리이고 국한됨은 성이다. 성과 리가 비록 단 하나의 리일 뿐이지만 성이라고도 하고 리라고도 하는 것은 쓰이는 곳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미 리자가 있는데 또 성자가 있는 까닭이다. ("南塘集" 권28, '李公擧上師門書辨': 盖單言性字則通局皆性也。單言理字則通局皆理也。以性與理對言。則通爲理而局爲性。性也理也。雖只一理。曰性曰理。用處不同。此所以旣有理字而又有性字也。)
성을 리가 기와 결합되어 변화된 것으로 보는 한원진은 초형기로서의 리와 인기질로서의 성을 각각 리통과 기국에 대비시키는 것이다.

3.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이러한 견해 차이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대한 이해에서도 또한 나타나다.
아직 발하기 전에 리가 기 가운데 있을 때 리만을 가리키면 본연지성이고, 기를 함께 가리키면 기질지성이다. 아마도 바꿀 수 없는 이론일 것이다. ("南塘集" 권11, '附未發氣質辨圖說': 未發之前。理具氣中。單指理爲本然之性。兼指氣爲氣質之性者。恐是不易之論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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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진은 현상계의 인간과 사물에서 리만 가리킨 것이 본연지성, 리기를 함께 가리킨 것이 기질지성이라 하고, 인기질의 관점에서 기질지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에 대해 이간은 '리기동실理氣同實', '심성일치心性一致'의 입장, 즉 리기를 분리해서 지적할 수 없고, 심心을 두고 성性만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심은 바르지 않을지라도 성은 스스로 중을 지킬 수 있고, 기는 순조롭지 않을지라도 리는 스스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니, 천하에 이런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선만을 가리킨 것은 기器와 분리하는 것이니, 사람의 경우에는 반드시 리기동실理氣同實 심성일치心性一致인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한다. ... 심은 둘이 아니다. 그러나 구속됨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두 가지로 지적한다면 이른바 대본지성이란 그 본연지심에 나아가 그것만 가리킨 것이고, 기질지성이란 그 기질지심에 나아가 함께 가리킨 것이다. ("巍巖遺稿" 권12, '未發辨': 心之不正而性能自中。氣之不順而理能自和。天下有是乎。故單指之善。自不干涉於其器。而在人則必待夫理氣同實。心性一致處言之者。... 心非有二也。以其有拘與不拘而有是二指。則所謂大本之性者。當就其本然之心而單指。所謂氣質之性者。當就其氣質之心而兼指矣。)
한원진처럼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을 구분하여 기와 별개로서의 리를 따로 끄집어내어 이를 본연지성이라 단지單指한다는 것은 이간이 보기에는 성이라고 하기가 곤란하다. 이간은 기와 분리된 리를 성이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와 결합된 리로서의 성이 본래의 리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리와 기가 공존하는 리기동실 심성일치의 상태를 고수하고자 한다. 본연지심에 나아가서 단지하면 본연지성이고, 기질지심에 나아가서 겸지하면 기질지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원진의 격렬한 비판을 유발한다.
p.216
심은 기이고 성은 리이다. 기는 맑거나 탁함 아름답거나 추함에 가지런하지 않음이 있지만 리는 곧 순선하다. 그러므로 리만을 가리키면 본연지성이고 리와 기를 함께 가리키면 기질지성이나 성에 두 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기질을 겸함과 겸하지 않음에 따라 두 가지 이름이 있을 뿐이다. ("南塘集" 권11, '附未發氣質辨圖說': 心卽氣也。性卽理也。氣有淸濁美惡之不齊。而理則純善。故單指理爲本然之性。兼指理氣爲氣質之性。性非有二體也。只是氣質之兼不兼而有二名耳。)
... 한원진은 하나의 물物, 하나의 심心에서 단지와 겸지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구분하고 기질지성의 관점을 택한 것이다. 이간은 자신의 일관된 리기 불상리 불상잡 및 리기동실 심성일치의 원칙은 고수할 수 있었지만, 하나의 사람 또는 사물 안에 두 개의 심과 두 개의 성이 존재하게 된다는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4. 오상론

... 이들은 인성과 물성의 동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증거를 오상五常에서 찾는다.

생각건대 만물이 모두 이 성을 가지고 있는데 오직 사람의 성이 가장 귀하고 지극히 선하게 되는 까닭은 인의예지의 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맹자가 성선을 논할 때 다른 말은 없이 다만 인의예지로써 말한 것이다. 만약 만물 중 지각 운동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모두 인의예지의 온적한 덕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면, 사람의 성이 가장 귀한다는 것은 과연 무슨 까닭이겠는가? ("南塘集" 권29, '論性同異辨': 盖萬物同有是性。而獨人之性爲最貴而至善者。以其有仁義禮智之德也。故孟子論性善。無他語。只以仁義禮智言之。若使萬物之有知覺運動者。皆具仁義禮智之全德。則人性之爲最貴者。果何事也?)

사물의 지각은 그 기가 오행의 거칠고 흐린 것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는 단지 거칠고 흐린 리를 얻을 뿐이다. 비록 일찌기 그 리가 없지는 않지만 또한 인의예지라고 할 수는 없다. <호랑이와 이리의 인仁, 벌과 개미의 의義와 같은 종류는 오행 가운데서도 그 증 하나의 빼어난 기를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는 인이 되고 의가 되지만, 끝내 온전할 수는 없다.> 사람의 지각은 그 기가 오행의 정밀하고 빼어난 것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리는 인의예지가 되고, 지각의 발현도 인의예지의 작용이 아님이 없다. ("南塘集" 권29, '論性同異辨': 物之知覺。其氣得五行之粗濁者。故其理只得爲粗濁之理。雖未嘗無其理。亦不可謂仁義禮智也。<虎狼之仁。蜂蟻之義之類。是於五行中亦得其一段秀氣。故其理爲仁爲義而終不能全也。> 人之知覺。其氣得五行之精英者。故其理爲仁義禮智。而知覺之發見者。莫非仁義禮智之用也。)
한원진에 따르면 리는 기와 결합함으로써 성이 되고 기의 청탁수박에 따라 오상을 가짐이 다르다. 사람만이 빼어난 기를 얻은 까닭에 오상도 온전히 갖추지만, 나머지 다른 사물들은 거칠고 흐린 기를 얻었으므로 다섯 가지 오상 중 일부만 갖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물의 성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간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우주에는 리와 기가 있을 뿐이다. 그 순수지선의 참됨, 무성무취의 오묘함은 천지만물의 똑같은 하나의 근원이다. 그것을 높여서 태극이라 하니 그 명칭은 포괄적이고, 그 전부를 세어 오상이라고 하니 그 조리가 분명하다. 이것은 곧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실체로서, 사람고 ㅏ사물이 받은 온전한 덕이다. ("巍巖遺稿" 권12, '五常辨': 夫宇宙之間。理氣而已。其純粹至善之實。無聲無臭之妙。則天地萬物。同此一原也。尊以目之。謂之太極。而其稱渾然。備以數 之。謂之五常。而其條粲然。此卽於穆不已之實體。人物所受之全德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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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것도 오상이고 치우친 것도 오상이다. 통하는 것도 오상이고 막힌 것도 오상이다. 모두 오상이지만 바르고 통하므로 발용할 수 있고, 치우치고 막혔으므로 발용할 수 없다. 이제 발용의 여부를 보고서 하나는 있다고 하고 하나는 없다고 한다면, 그 뜻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巍巖遺稿" 권4, '上遂菴先生-別紙': 正亦五常也。偏亦五常也。通亦五常也。塞亦五常也。同是五常。而正且通。故能發用。偏且塞。故不能發用。今見其發用與否。而謂之一有。而一無。無迺爲未盡耶?)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되고 그 근원을 세부적으로 지칭할 때 오상이라고 하므로 사람과 사물이 오상을 온전히 받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오상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태극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사람이건 사물이건 오상을 온전히 갖추고는 있지만, 다만 겉으로 드러남(發用)에서 차이가 날 뿐이라는 것이다.
이간에 의하면 우주만물의 이치인 리가 기 속에서도 그대로 보존되므로 사람과 사물의 차이는 그 발용에서 드러날 뿐이다. 그러나 한원진의 경우 리가 기 안에 들어갔을 때는 그 원인이 기이든 리이든, 이 때의 리는 이미 기와 결합하면서 성으로 변화된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성이 온전한 오상을 갖추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5. 미발의 심체 문제

사람과 사물의 성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단지 존재론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결국은 가치론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에 윤리적 가치 실현 능력인 오상이 어떻게 갖추어져 있는가를 문제시하는 한편, 더욱 구체적으로 선악의 가치 실현 가능성을 미발의 심체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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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에서 다룬다. 성을 기중지리로 보는 한원진은 심체도 성과 대비되는 기의 측면에서 바라본다.
심이란 기의 모임이니 그 체는 본래 허虛이다. 허이므로 어둡지 않고 기이므로 가지런하지 않다. 그 체가 본래 허하여 어둡지 않다는 데서 말하자면 이를 선善이라 하고, 그 기의 모임이 가지런하지 않다는 데서 말하면 선악善惡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미 선이라 하고 또 선악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말이 각기 가리키는 바가 있어 서로 방해되는 일이 없다. 기 가운데 있는 성은, 그 미발허명함을 가리켜 대본지성이라 하고, 기품이 가지런 하지 않음을 겸하여 말하면 이를 일러 기질지성이라 한다. ("南塘集" 권11, '擬答李公擧-附未發五常辨': 心者氣之聚而體本虛也。虛故不昧。氣故不齊。自其體本虛而不昧者言則謂之善。自其氣之聚而不齊者言。則謂之有善惡。然則旣謂善而又謂有善惡者。言各有所指而未甞相妨也。性在氣中者。卽其未發虛明而中。則謂之大本之性。兼其氣禀不齊而言。則謂之氣質之性。)

심은 기이고 성은 리이다. 기는 청탁미악의 가지런하지 않음이 있지만 리는 곧 순선하다. ... 기는 비록 청탁미악의 다양함이 있을지라도 미발시에는 기가 움직이지 않으므로(不用事) 선악이 드러나지 않고 고요히 텅 빈 듯 맑을 뿐이다. 비록 고요히 텅 빈 듯 맑을 지라도 그 기품 본래의 청탁미악은 또한 없을 수가 없다. ("南塘集" 권11, '擬答李公擧-附未發氣質辨圖說': 心卽氣也。性卽理也。氣有淸濁美惡之不齊。而理則純善。故單指理爲本然之性。兼指理氣爲氣質之性。性非有二體也。只是氣質之兼不兼而有二名耳。氣雖有淸濁美惡之不齊。而未發之際。氣不用事。故善惡未形。湛然虛明而已矣。雖則湛然虛明。其氣禀本色之淸濁美惡則亦未甞無也。)
리만을 가리켜 말한다면 본연지성이라 하고 리기를 겸하여 말하다면 기질지성이라 하지만, 한원진이 사람과 사물의 성을 이야기할 때 택하는 관점은 기질지성이다. 그러므로 심체에서 기가 발하지 않았을 때에도 기의 선악이 드러나지 않은 것뿐이지 본체에 기의 청탁이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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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한원진은 미발을 외물에 접촉하지 않은 고요한 상태에서 기가 발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간은 일반적인 기와 심의 기를 구분한다.
기는 하나이지만 그 거친 것을 말하면 혈기이고 그 섬세한 것을 말하면 신명이다. 거칠고 섬세한 것을 통틀어 기라고 한다. 그러나 심은 혈기가 아니고 신명이다. 심체는 지극히 섬세하지만 기질은 지극히 거칠며, 심체는 지극히 크지만 기질은 지극히 작다. ("巍巖遺稿" 권13, '未發辨後說': 夫氣一也。而語其粗則血氣也。語其精則神明也。統精粗而謂之氣。而所謂心則非血氣也。乃神明也。心體也至精。而氣質也至粗。心體 也至大。而氣質也至小。)
한원진과 달리 심체의 기와 일반적인 기질을 구분한 이간은, 다시 진정한 미발을 혈기와 뒤섞여 있는 미발과 구별한다.
명덕본체는 성인과 범인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고 혈기청탁은 성인과 범인이 다르게 가지고 있다. 명덕은 천군이고 혈기는 기질이다. 천군이 주재하면 혈기가 백체에 물러나서 마음이 텅 비어 환하게 되니, 이것이 대본의 소재이며 자사가 말한 '미발'이다. 그러나 천군이 주재하지 못하면 혈기가 마음에서 용사하여 청탁이 가지런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선과 악이 뒤섞인 것이다. 덕소(한원진)는 이것을 미발이라고 말하고 있다. ("巍巖遺稿" 권12, '未發辨': 故愚謂明德本體。則聖凡同得。而血氣淸濁。則聖凡異稟。明德卽天君也。血氣卽氣質也。天君主宰。則血氣退聽於百體而方寸虛明。此大本所在。而子思所謂未發也。天君不宰。則血氣用事於方寸。而淸濁不齊。此善惡所混。而德昭所謂未發也。)
이간에 의하면, 한원진은 단지 발하지는 않았지만 혈기가 마음에서 용사하는 것을 미발이라고 한다. 그 반면에 자신이 말하는 미발은 단지 외물에 접촉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명(天君)을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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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는, 즉 리의 실현 가능태를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각각 '부중의 미발(不中底未發)'과 '중의 미발(中底未發)'이라고 하여 구분한다.
...

p.223
4. 논쟁의 의의

인성과 물성의 동이 문제는 18세기 초에 시작된 후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거의 모든 지식인이 관심을 기울였던 문제였다. ... 논쟁의 의의를 정리해보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성性 개념의 다의성, 특히 주희가 사용하는 성 개념의 혼란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사단칠정 논쟁을 거치면서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깊이는 이미 중국을 능가하였다. 우주와의 관련 속에서 인간의 심성정을 정밀히 탐구해왔던 이들은 성 개념의 다의성에 주의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인간 심성의 긍정적 능력을 고양하여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고자 했던 조선 성리학자들에게는 필연적인 과제였다. ...
둘째, 중국 이외에 새로이 등장하는 세력에 대한 대처 문제와 관련된 논의라는 것이다. 병자호란(1636~1637)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맛본 후,
p.224
'가장 사람다운 사람의 문화'로서 중화 문화를 추구하며 소중화를 자부했던 조선이, 짐승에 가깝다고 여기며 천시했던 오랑캐의 강대한 세력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것은 그 당시 커다란 문제였다. 따라서 이 논쟁을 화이론적인 문화적 우월성에 입각하여 거론되었던 북벌론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도 있다. 또한 같은 논의의 차원에서 정반대의 입장으로 북학파의 인물성론에 주목하는 시도도 있다. 북학파, 특히 홍대용과 박지원은 사람을 포함한 만물이 모두 똑같이 기로 구성되고 공통된 생명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만물은 균등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사람의 입장에서만 세계를 볼 것이 아니라 사물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객관적 상대적 관점을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의 상대화 객관화는 중세 사회의 계층적 질서를 부정하고 근대적인 사회 질서를 만들어 가는 데 있어 중요한 사고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인심도심론의 실천적 의미 - 이상익

인심도심론의 실천적 의미 - 이상익 致知
2008/12/03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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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익, <인심도심론의 실천적 의미>, <<주자학의 길>>, 심산, 2007.


1. 인심 도심에 대한 개괄적 논의
p.245
주자는 인간의 몸을 주재하는 것은 마음인데, 마음에는 인심과 도심의 두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 즉 마음의 본질적 기능은 지각인데, 천리를 지각하면 도심이요, 욕망을 지각하면 인심이라는 것이다. '형기지사'에 근원하는 인심은 '사적 욕망'을 지각하고 추구하는 것이며, '성명지정'에 근원하
p.246
는 도심은 '공정한 천리'를 지각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
p.247
인심이란 육체(형기)로 인해 생기는 마음으로서,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고자 하고, 추우면 옷을 입고자 하며, 정욕이 일면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된다. 주자는 인심을 '형기지사' 또는 '인욕지사'와 연결시켜 설명하였다. '사'란 '개체에 속한다'는 뜻이니,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인심이다. 도심이란 인의예지의 본성(천리)으로 인해 생기는 마음으로서,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 등이 이에 해당된다. 주자는 도심을 '천리지공' 또는 '성명지정'과 연결시켜 설명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도 함께(公) 할 수 있도록 바름(正)을 추구하는 것'이 이 도심이다.
위의 인용문(중용장구서)은 인심도심론에 대한 기본적 논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첫째, 인심과 도심은 모두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인심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육체적 생존을 뒷받침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지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다. 또 도심은 인의예지의 본성으로부터 발하는 것으로서, 하우 역시 도덕적 지각능력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인심만으로는 위태롭고,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존엄성을 담보할 수 없다. 반면에 도심만으로는 은미하고,
p.248
인간의 육체적 생존을 뒷받침할 수 없다. 따라서 양자는 항상 동시에 요구된다는 것이다. 둘째, 도심이 인심을 주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 주재: 주자학에서 '주재'라는 말은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된다. 첫째, "리가 기를 주재한다"고도 말하는데, '리의 주재'는 '리가 기의 운동의 표준이 됨'을 뜻한다. 둘째, "기가 리를 주재한다"고도 말하는데, '기의 주재'는 '기가 리를 맡아서 운용함'을 뜻한다. 셋째, "도심이 인심을 주재해야 한다"고도 말하는데, '도심의 주재'는 '도심이 인심에게 합당한 길을 명령함'을 뜻한다.
즉 인심과 도심은 모두 불가결한 것인바, 양자의 바람직한 관계는 '도심이 인심에게 합당한 길을 제시하고, 인심이 항상 그에 따르는 것'이라고 본다. 주자는 '유정유일'을 "인심인지 도심인지 정밀하게 살피고(精), 도심의 주재를 전일하게 관철시킴(一)"으로 설명하였다. 셋째, 천하를 다스리는 것처럼 중대한 일도 인심과 도심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것, 즉 '유정유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주자에 의하면, 인심이란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사적인 것이다. 이것은 다시 두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둘째는... 사치와 방탕에 빠지는 것이다. 주자는 첫째에 대해서는 '성인도 없을 수 없는 것'으로 긍정하지만, 둘째에 대해서는 '인욕으로서 결국 악으로 귀착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p.249
그리하여 인심을 곧바로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다만 '危'라고 규정한 것이다. ...
인심은 그 자체로서는 '정당성에 대한 자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위태로운 것이다. 주자는 그러므로 인심은 도심의 주재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인심과 마찬가지로, 도심도 역시 두 맥락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육체적 욕망과는 무관하게 순수하게 인륜과 정의만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군신과 부자의 윤리를 아는 것'·'의리를 아는 것'·'측은지심과 수오지심' 등을 도심이라고 규정한다. 둘째는 육체적 욕망과 관련
p.250
된 것이라도 도심의 주재를 받으면 역시 도심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그 마땅히 성내야 할 것을 성내는 것'·'음식의 ㅇ로바름을 얻은 것' 등도 도심으로 규정한다. 요컨대 인심도 도심의 주재를 받아 공정하게 추구된다면 도심이 된다는 것이다. '도심의 주재를 받아 공정하게 인심을 추구한 것'이 바로 '윤집궐중'일 것이다. '윤집궐중'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인심과 도심의 조화'로 해석될 수 있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사익과 공익의 조화'로 해석될 수 있다.
주자 인심도심설의 결론은 '도심으로 인심을 주재하라'는 것인데, 이는 곧 '공정성의 원칙에 입각하여 사적 욕망을 추구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개인의 입장에서는 왜 사적 욕망을 공정성의 원칙에 종속시켜야 하는가? 그것은 "천리를 따르면 사익을 추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불리함이 없으나, 인욕을 따르면 사익을 추구해도 얻어지지 않고 오히려 손해가 따르기 때문"이다.  


2. 합리성으로서의 인심과 합당성으로서의 도심
p.251
롤즈는 인간은 본래 善觀과 정의감이라는 두 가지 도덕적 능력을 지닌다고 전제하고, 이 두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만이 '도덕적 인격'으로서 '시민'의 자격이 있다고 본다. 롤즈는 합리성을 선으로 규정하고, 합당성(공정성)을 정의로 규정한다. ...
롤즈는 선을 '애착과 추구의 대상'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선관의 능력'이란 '우리들이 가치있는 인생이라고 느끼는 선의 관념을 형성하고, 수정하고, 추구하는 능력'이다. 롤즈는 선관은 '궁극적 목표와 목적 그리고 욕망의 결정적 체계'로 이루어지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본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선관이 '사적'인 것이라면, 합당성을
p.252
추구하는 정의감은 '공적'인 것이다. 롤즈는 정의감 즉 합당성을 추구하는 것은 이타적인 것도 아니고, 이기적인 것도 아니며, 다만 공정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롤즈는 합리성과 합당성을 대비함에 있어서, 합리성을 추구하는 선관은 각자의 목표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것은 다양할수록 좋다고 하였고, 합당성을 추구하는 정의감은 각자의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또는 방법) 상의 원칙으로서 그것은 마땅히 합의를 통해 통일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
p.253
롤즈에 의하면, 합리성은 자신만의 고유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요, 합당성은 타인과의 공정한 협력조건 즉 정의의 원칙을 제시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롤즈는 합리성이 결여되면 자신만의 고유한 인생목표를 실현할 수 없고, 합당성이 결여되면 구성권 상호간의 신뢰나 협력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양자는 상호보완적인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합리성과 합당성은 반드시 결합되어야 하는데, 그 결합은 합당성이 합리성에 우선하는 결합이어야 한다('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 롤즈는 이것을 '인격의 통일성'이라 하였다. '인격의 통일성'은 개인으로 하여금 결국 '한정적 선관'을 지니게 만드는데, 그것은 합당성(정의의 원칙)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목표(선)를 추구함을 말한다. ...
p.254
주자는 인심을 설명할 때에는 대부분 그것이 '개인의 육체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었다. 그런데 위(<문장경부>)에서는 '영위하고 모려하는 바가 있는 것'을 인심이라 했는 바, 이는 보다 직접적으로 인심이란 '사익(사적 목표)을 추구하는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사익을 추구함이 천리에서 벗어날 때에는 사욕이라 한다"고 해석한 것이다...
p.255
요컨대, 주자는 인심을 '사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이 천리(합당성)에서 벗어날 때는 특히 사욕이라 한 것이다.* ...
* 오늘날 학계에서는 보통 주자가 초년에는 정자의 "인심은 사욕"이라는 주장을 따랐다가, 뒤에는 "인심과 인욕을 동일시 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이 말을 따르지 않은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위 인용문(문장경부)으로 보면, 주자는 한때는 정자의 "인심은 사욕"이라는 주장을 의심했다가, 뒤에는 다시 승인한 것 같다. 즉 정자의 "인심은 사욕"이라는 주장에 대해, 주자는 처음에는 따랐다가, 중간에는 의심했었고, 최종적으로는 다시 승인했던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회에 상론하기로 하겠다.
(주자는) 인심을 맹자의 '이목지관'에 비유하고, 도심을 맹자의 '심지관'에 비유했다. 눈과 귀는 사물을 보고 듣는 기능은 있으나, (시비와 선악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눈과 귀만 있
p.256
다면, 보고 듣는 대상 사물에 이끌리게 마련이다. 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인 바, 보고 듣는 대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대상 사물에 이끌리는 것의 가부를 결정하는 것이 마음의 역할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맹자는 '먼저 그 대체(마음)를 확립함이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인데, 주자는 '먼저 그 대체를 확립함'을 '도심의 주재를 확립함'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
또한 "인심은 사사로운 쪽만 알 뿐"이라 했는데, 이는 "인심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위태롭다"는 말이다. 한편, "도심은 다만 도리의 공정한 쪽만 알 뿐"이라는 말은 "도심만으로는 각자의 사적 목표를 이룰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인심만으로는 위태롭고 도심만으로는 각자의 사적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한다면, 원만한 삶을 위해서는 인심과 도심이 반드시 서로를 보완해야 하는 것이다... 도심의 주재를 받으면 인심도 도심이 되는 것이라 했는데, 이는 바로 인심과 도심을 바람직하게 매개하는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인심·도심'에 대한 주자의 이러한 설명은 롤즈의 '합리성·합당성'에 대한 설명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첫째, 롤즈는 합리성과 합당성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주자가 인심은 '형기지사'에 근원하고 도시은 '성명지정'에 근원한다고 본 것과 상응한다.
둘째, 롤즈는 합리성은 개인의 사적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며 합당성은 사회의 공적 원칙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주자가 인심은 사적 욕망(인욕지사)을 추구하는 것이요 도심은 공적 원칙(천리지공)을 주수하는 것이라고 본 것과 상응한다.
셋째, 롤즈는 '합리성만으로는 부당하고 어처구니가 없다'고 보았는
p.257
데, 이는 주자가 '인심은 오직 위태롭다'고 한 것과 상응한다.
넷째, 롤즈는 합리성과 합당성은 상호보완적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주자가 인심과 도심을 모두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규정한 것과 상응한다.
다섯째, 롤즈는 합당성이 합리성에 우선한다고 규정했는데, 이는 주자가 인심은 도심의 주재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한 것과 상응한다.
여섯째, 롤즈는 합당성(정의원칙)에 있어서는 통일(합의)을 이루어야 하고 합리성(선관)에 있어서는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주자의 리일분수설과 상응한다. ...
다만 문제는, 롤즈는 합리성을 선으로 규정하는데, 주자는 인심을 선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롤즈가 단순히 합리성을 선이라 한 것은 '선에 대한 기초론(thin theory)'이었다. 롤즈도 '선에 대한 완전론(full theory)'에서는 '합당성과 결합된 합리성만이 선'이라 하고, 이것을 '도덕적 선'이라 불렀다. 롤즈는 '선에 대한 기초론'은 '도덕적 중립성'을 취하는 것이라 했다. 이는 사실 주자가 '인심은 위태롭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롤즈가 '선에 대한 완전론'의 입장에서 '합당성과 결합된 합리성만이 도덕적 선'이라고 한 것은, 주자가 "인심도 도심의 주재를 받으면 도심이 된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3. '공정한 원칙'에 따른 '사익의 추구'
p.258
주자는 개인의 시비득실이나 국가의 치란안위를 궁극적으로 '인심·도심의 문제'로 규명했다. ...
p.259
'인심과 도심'은 오늘날의 일반적인 개념으로는 '욕심과 양심'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항상 욕심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그 갈등을 어떻게 결말짓느냐에 따라 시비득실과 치란안위가 결정된다는 것이 주자의 설명이다. ...
p.261
(주자는) 인심과 도심을 '욕망의 마음'과 '의리의 마음'으로 구분하고, 도심은 인심의 사이에서 '섞여서 나오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양심과 욕심이 혼재하면서 양자가 갈등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욕망의 마음'과 '의리의 마음'이라는 논법은 결국 욕망에는 '추구해도 되는 욕망'과 '추구해서는 안 되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요, 그것을 판가름해주는 것이 '의리'라는 논법인 것이다... '도심의 주재'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설명하였다. 첫째는 인심이 도심을 준칙(표준)으로 삼아 자신의 욕망을 추구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둘째는 인심이 '도심의 區處'를 따라야 한다는 설명이다. '구처'란 말그대로 '구분하여 처리함'을 뜻한다... 셋째, '정밀하게 실핌과 전일하게 지킴' 역시 도심의 주재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
p.264
주자는 '도심의 주재에 따른 인심'을 '도심'이라 하기도 하고, '인심이지만 도심을 잃지 않은 것'이라 하기도 했으며, '인심 또한 변화하여 도심이 된다'고도 하였다. 이처럼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위의 내용들은 '합당하고 공정한 방식으로 인심으로 추구하라'는 점에 있어서는 모두 일치하는 것이다. ...
인성론적 개념으로서의 인심과 도심은 사회철학적 개념으로서는 각각 '사적 욕망'과 '공정한 규범'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주자가 그리는 이상사회는 '공정한 규범'의 주재 하에 개인의 '사적 욕망'이 실현되는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인심만을 발휘한다면, 그러한 사회는 곧 혼란과 갈등에 빠지게 된다. 혼란과 갈등 속에서는 '개인의 정당한 권리'마저도 보호될 수 없다. 따라서 개인적 차원에서나 사회적 차원에서나 도심의 주재는 긴요한 것이다. '사적인 인심'은 '공정한 도심'의 주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 자체 '사적 욕망을 배제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다만 사적 욕망은 공정성의 한계 안에서 추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도심의 주
p.265
재에 따른 인심'은 '도심'이라 하였듯이, 공정한 규범에 따라서 추구한 사익은 정당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자의 인심도심론이 제시하는 삶의 모습이란 '공정한 원칙에 따라 사익을 추구하는 삶'이라 하겠다. '공정한 원칙에 따른 사익의 실현'은 또한 '유정유일 윤집궐중'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인심과 도심 - 몽배원

인심과 도심 - 몽배원 致知
2009/01/04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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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배원, <<성리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08.
'미발'과 '이발'이 사람의 주체의식, 특히 정감의식과 잠재된 본체의식에 대해서 분석하고 해석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도심'과 '인심'은 현상적으로 이미 발한 것, 즉 이미 밖으로 표현된 주체의식에 대해서 분석하고 해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도심·인심과 미발·이발 사이에는 논리적 연관성이 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전자는 후자를 구성하고 있는 한 부분이고, 내용적으로 말한다면 전자는 후자가 한 단계 더 전개된 것이다.



1. 송대 이전
도심과 인심은 <<고문상서>> <대우모>편에 제일 먼저 나타나는데, 거기에서는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마음을 정미하고 한결같이 하여 中을 잡으라"라고 말한다. 이 말은 도의의 심은 은미
p.581
하여 잘 드러나지 않고 보통 사람들의 심은 위태하여 안정되기 어려우므로, 오직 심을 정미하고 한결같이 하면서 다른 것을 섞지 않아야 중을 보존하고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뒷날 순자는 <해폐>편에서 <<도경>>을 인용하여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한데, 오직 지혜로운 군자라야 위태로움과 은미함이 나누어지는 기미를 알아차릴 수 있다"라고 말한다. 지금으로서는 <<도경>>이 어떠한 책인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순자 이전에 이미 도심과 인심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순자의 사상에 따르면 인심은 일반적인 사물을 아는 마음을 가리키고, 도심은 도를 아는 마음을 가리킨다. 도는 하늘의 도와 사람의 도를 포함하는 것으로, 객관사물들의 보편법칙을 가리킨다. 심은 허일이정하기 때문에 리를 살피고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는데,.. 이렇게 도를 아는 마음이라야 만물을 마름하고 관장할 수 있다. 순자의 중심 사상은 이지적인 마음의 인식능력에 잘 표현되어 있다. 만약 이러한 사유의 방법에 따라서 발전했다면 훌륭한 인식이론의 발전이 있었겠지만, 실제로 이러한 발전은 없었다.(--;)
2. 북송시대
p.582
도심과 인심이 성리학 심성론의 중요한 개념이 된 것은 정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도심을 도에 합치하는 심 혹은 도를 깨닫는 심으로 해석했지, 지식에 관계된 인식심으로 해석하지는 않았다. 도를 깨닫는 심이란 바로 자아 체험의 도덕본심으로, 다시 말해 이것은 깨닫는 것을 마음으로 여기는 그러한 심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도덕의식과 도덕관념이다... 정이는 사람마다 모두 선험적인 도덕본심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
이것은 바로 내재된 이성의 원칙이며 또한 도덕본체의 자기현현으로, 사실상 내재화된 사회윤리의식이다.
인심은 감성과 같은 자연적인 본능이나 물질욕망 등의 개인의식으로 설명된다. 여기에서는 개인의식과 집단의식이 관계가 문제로 제기되는데,
p.583
이 부분은 성리학 심성론이 한 단계 더 발전한 모습이다. 하지만 정이는 인심, 즉 개인의식을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을 취한다. ...
정이는 도심과 인심을 대립시켜, 도심은 바른 것이고 인심은 사악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정미하고 한결같은 공부를 함으로써 도심을 잘 보존하여 인심에 의해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정이가 보기에 도심과 인심 곧 집단의식과 개인의식은 대립적이기 때문에 조화될 수 없고, 따라서 이 둘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반드
p.584
시 인심을 없애버려야 도심을 보존할 수 있다... 그는 도심과 천리를 같은 것으로 보고, 인심과 인욕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그 자체로 개인의 이익과 개인의 의식을 희생시켜 집단의 이익과 집단의 의식에 복종시키려는 의미를 가진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3. 남송시대
주희는 정이의 관점이 가진 극단성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정이의 견해를 고쳐 인심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제기했다. 또한 인심에 대해 좋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더욱이 그것을 소멸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
p.585
주희가 "사람은 하나의 심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을 때의 심은 지각하는 심이지 본체의 심은 아니다. 지각하는 심은 비록 본체의 심과 떨어질 수는 없지만, 형이상의 초월적인 심과 같은 수는 없다. 형이하의 지각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말하면, 리를 지각해야 할 뿐 아니라 기도 지각해야 한다. 여기에서 도심과 인심의 구별이 생겨난다.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들 모두가 가지고 있다. 그 지각되는 것에는 이성에 의해서 지각되는 것도 있고 감성에 의해서 지각되는 것도 있는데, 이 역시 사람들 모두가 가지고 있다. 도덕이성에 대한 자기인식이 바로 도심으로, 의리지심이라고도 부른다. 이에 비해 생리적 필요에 따라 발생하는 감성을 인식하는 것이 인심으로, 물욕의 심이라고도 부른다... 인식주체로서의 사람은 이성적 측면과 감성적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또한 집단의식과 개인의식도 함께 가지고 있다. ...
p.586
주희는 또한 도심은 도덕적 의리에서 생하거나 발하고, 인심은 육체적 욕망에서 생하거나 발한다고 생각했다. ...
지각은 주체의식의 인식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에서 생겨난다'거나 '~에서 발생한다'라는 말은 근원의 측면에서 말한 것으로, 이러한 두 가지 설명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주희가 보기에 도심과 인심은 모두 성에 근거하지만, 도심은 본연지성에 근거하고 인심은 기질지성에 근거한다. 도심은 선험적 도덕의식이고, 인심은 생리적 욕구이다. 하지만 주희는 도심과 인심을 근원의 측면에서보다 인식주체의 인식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말한 지각을 더 강조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의리에서 지각하는 것은 도덕의식의 자각 또는 도덕의식의 직각이고, 욕망에서 지각하는 것은 배고프고 추우며 아프고 가려운 것 등과 같은 감성적 지각이다. 이것이
p.587
바로 인심과 도심에 대한 주희의 기본적인 해석이다. ...
입이 좋은 맛을 원하는 것, 눈이 좋은 색을 보기 원하는 것, 귀가 좋은 소리를 듣기 원하는 것, 코가 좋은 냄새를 맡기 원하는 것, 육체가 편안하기를 원하는 것 등은 모두 성이지만, 이러한 것에 따라서 지각하게 되면 바로 인심이 된다. 이것이 비록 성의 본원은 아니지만, "성 가운데 이 리가 있어서, ... 저절로 이와 같이 드러나는 것이다."(惟性中有此理, ... 自然發出如此.) ...
그는 도심과 인심 모두 이발한 심 상태를 가리켜서 말하고 있으며,.. 측은지심 등과 같은 것을 도심이라 하고 희노애락과 같은 것을 인심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이것은 도덕정감과 자연정감을 말한 것이다. 도심은 바로 현실적 감성
p.588
의 형식을 통해 초월적 도덕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
인심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것에 빠져 도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잊어버리면 그것 역시 해가 된다. 따라서 인심은 반드시 도심의 주재와 조절을 받아서 바름으로 돌아가야 한다. ...
하지만 인심 이외에 달리 도심이 있어서 그것이 인심을 통제하고 지배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인심과 도심은 본질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층차의 구분만 있을 뿐이다.
p.589
자아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식은 공공의 윤리의식에 복종하고, 윤리의식은 개인의식을 통해 표현된다. 주희는 윤리의식이 개체의식과 따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이것은 주희의 사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동시에 그는 개인의식과 윤리의식 사이에는 대립되는 일면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는데, 이것 역시 중요한 부분이다.

인심과 도심 - 최진덕

인심과 도심 - 최진덕 致知
2009/01/05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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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덕, <<주자학을 위한 변명>>, 청계, 2000.

1. 주자의 인심도심설
p.233
인심도심은 둘 다 신묘불측한 심의 지각 작용이다. 다만 인심은 형기지사에서 유래하고 도심은 성명지정에 근거하기 때문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심이란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는 등의 생리적 욕구를 가리킨다. 이 욕구는 인간의 신체에서 유래한다. 신체는 만인이 공유하는 공적인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사적인 것이다. 그래서 형기지사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형기지사에서 나오는 인심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으며, 그 자체가 인욕지사의 악은 아니다. 그러나 인심은 인욕지사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危'라고 했다.
p.234
이 위태로운 인심은 의리를 지향하는 또하나의 지각 작용인 도심에 의해 통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도심은 맹자의 사단과 같은 마음이다. 도심은 성명지정에 근거한 것이며, 천리지공을 따라가는 심의 작용이다. 도심은 인간의 생리적 욕구인 인심처럼 현저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도심은 '微'라고 말한다. ...
인심도심은 모두 심의 지각 작용이며, 하나의 심 속에 섞여 있다. 그러나 하나는 통제받아야 하고 다른 하나는 통제한다. ...
주자의 인심도심에 대한 풀이는 분명히 도덕 의식에 의해 지배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인심도심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단순한
p.235
도덕적 설교에 불과한 것은 결코 아니다. 주자는 여기서 리기론이라는 광대한 우주론적 사유를 배경으로 인간의 생리적 욕구와 우주적 이법 사이의 미묘한 이중적 관계를 말하고 있다. 주자는 인간의 신체에서 유래하는 생리적 욕구인 인심과 보편적인 우주적 이법을 지향하는 도심이 심의 작용 안에 자연적인 것으로서 동시에 자리잡고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주자는 동일한 심의 지각 작용인 인심과 도심을 둘로 나누기 위해 애쓴다. 그의 주된 관심은 역시 양자를 확연히 나누는 도덕적 측면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심과 도심은 이미 그 유래로부터 구분된다. "인심은 형기지사에서 발생하고 도심은 성명지정에서 근원하여 지각이 되는 소이가 다르다"고 주자는 말한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인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 송명리학의 근원적인 딜레마이다. 도덕적인 것은 근본적으로 자연적인 것이고, 자연적인 것을 떠나서는 도덕적인 것이 도저히 성립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자연적인 모든 것이 도덕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자의 인심도심설은 이 딜레마 앞에서 인심과 도심이 모두 하나의 심에 주어진 자연적인 것이라고 일단 인정하면서도, 양자를 그 유래에서부터 애써 구분하는 양면적인 전략을 구사한다. 주자의 이같은 전략은 과연 성공적인 것일까.
기와 리, 형기와 성명이 이물일 수 없고, 모든 것이 리기의 합이라는 주자 리기론의 전제에서 본다면, 하나의 심에 귀속되는 인심과 도심을 그렇게 형기와 성명으로 판연히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일단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형기지사에서 발생하는 인심 역시 성명지정에 근원하지 않을 수 없고, 성명지정에 근원하
p.236
는 도심 역시 형기지사가 없으면 발생할 수 없다. 형기와 성명은 애당초 구분되지 않는다. 양자는 불가분하게 상호 침투해있다. 형기와 성명, 인심과 도심을 이물로 구분하면, 성명이나 거기에 뿌리박은 도심은 공허해져서 석노의 학문으로 흘러갈 것이다...
주자의 인심도심설은 한쪽에 심이라는 근원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천리와 인욕의 엄격한 변별이 있지만, 그것이 역점을 두고 있는 방향은 천리와 인욕의 변별 쪽이다.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따르게 하여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자는 것이 주자의 근본 취지이다. 자연주의에 바탕한 도덕주의가 다시 자연주의를 압도하고 있는 셈이다. 자연과 도덕의 미묘한 일치와 괴리라는 송명리학의 근원적인 딜레마가 주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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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심도심설에서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인심과 도심을 이분하고 인심에 대한 도심의 주재적 기능을 강조하는 도덕주의적인 의도를 충분히 살리기 위해서는 인심과 도심을 다 같은 심으로 보기 보다는 차라리 양자를 정과 성 혹은 심과 성으로 그 근원에서부터 나누어 보는 것이 더 일관된 해석일 것이다. 주자가 자신의 도덕주의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인심과 도심을 둘 다 이발의 지각이라고 보는 것은 <<서경>>의 인심과 도심이 모두 심자를 가지고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문헌적 사실에 구애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2. 체용론적 해석
인심이나 도심 모두 심이다. 심은 하나인데 성인이 둘로 나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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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 것은 단지 그 '지각이 되는 소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도심은 심의 일정불변한 체이고 인심은 심의 변화무쌍한 용으로서 양자가 애당초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정암은 풀이한다. 그래서 정암은 인심도심을 성체정용이라는 심성론적 틀에 끼워 맞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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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은 <계사전>의 말을 동원하여 도심을 적연부동의 至精之體(性)로 보고, 인심을 감이수통의 至變之用(情)으로 본다. 바로 그 때문에 위와 미에 대한 해석도 주자와 달라진다. 주자는 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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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하고 불안하다'로, 미를 '미묘하고 살피기 어렵다'로 풀이한다. 주자의 이런 풀이는 두 가지 다른 지각 작용을 형용한 것이다. 반면에 정암은 인심과 도심을 주자와 달리 정용과 성체로 나누어보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으므로 위하고', '살필 수 없으므로 미하다'고 풀이한다. 그렇다면 정암에게 위는 '음양불측의 神'과 같은 뜻이고, 미는 '형이상' 혹은 '무성무취'와 같은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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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나 정암에게 인간의 심리 현상은 우주의 자연 현상과 근본적으로 동질적이다. 그러나 인심도심의 해석에서 주자는 인심도심을 심리 현상의 테두리에 국한시켜 보는 경향이 강한 반면, 정암은 인심도심을 주저없이 우주의 자연 현상과 연결시킨다. ...
도심은 일음일양의 실체인 도가 사람에게 내재된 것이고, 인심은 음양불측의 묘용인 신이 사람에게 내재된 것이다.
3. 인심도심과 천리인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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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심도심을 이처럼 성체정용의 심성론으로 풀이했기 때문에 인심도심과 천리인욕의 관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주자는 인심을 인욕으로, 도심을 천리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정암은 '인심은 인욕이고 도심은 천리'라는 정자의 말을 전폭적으로 시인한다. ...
정암에게 인욕은 곧 性之欲이다. 정암은 욕과 인욕을 전혀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미리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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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할 필요가 있다. 정암에게 인욕은 '人이 가진 欲'이란 뜻 외에 다른 뜻이 없다. 정암에 의하면 '성지욕'의 욕은 칠정의 하나인 동시에 칠정을 대표하는 것이다. ...
정암에게 욕은 感物而動한 전부이며, 곧 정이다. 즉 욕은 심의 동 혹은 이발을 가리킨다. 결국 정암에게 욕 혹은 인욕은 그의 인심 개념과 다르지 않다.
또한 정암은 욕 혹은 인욕이 '天之性'과 마찬가지로 人이 아니라 天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한다. 심의 동정은 곧 천의 동정이다. ...
p.244
욕·인욕에 대한 정암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암이 "인심은 인욕이다", "인이 욕을 갖는 것은 천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말하고, 심지어 주자의 '거인욕' 혹은 '알인욕'까지도 부정하는 것을 본다면, 주자학에서 벗어난 근대적인 욕망 긍정론 혹은 욕망 해방론의 징조로 잘못 읽기 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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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의 인욕은 심의 지각 작용 전부를 가리킨다. 정암의 인욕은 주자가 말하는 형기지사에서 발생하는 인심과 성명지정에 근원하는 도심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즉 인간의 생리적 욕망과 감각 작용과 인식 작용이 모두 인욕 속에 포함된다.
4. 절욕의 윤리학과 대본
정암은 인욕 즉 인심이 천에서 나온 것이며 결코 제거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인간 조건이라고 보면서도, 인욕의 모든 현상을 다 긍정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그와 주자의 차이가 개념 정의의 차이에 불과하며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정암 역시 절욕의 윤리학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욕을 악이라 할 수 없다. 욕이 선이 되고 악이 되는 것은 節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p.248
절욕의 윤리학은 자연과 인간, 욕구와 도덕의 교차점에 서 있다. 절욕의 윤리학은 상호 배척하는 두 원리 사이의 불안한 균형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쉽게 이론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유가 철학의 절욕의 윤리학은 늘 무욕과 종욕 사이에서 고심한다. 이론적으로 생생의 세계에 뿌리박고 있는 송명리학의 경우는 그런 고심이 더욱 심각하다. 욕은 생의 가장 현저한 발로이기 때문이다. ...
인심과 도심, 인욕과 천리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암과 주자는 절욕의 윤리학이라는 유가 철학의 철칙을 공유하고 있따. 절욕의 윤리학은 인간의 자연적 욕구와 그 욕구를 규제하는 원리의 구별,..을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구별 속에서 욕구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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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욕구를 규제하는 원리 즉 대본에 더 비중을 둔다. 규제하는 것은 규제당하는 것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주자 역시 절욕의 윤리학에 따라 인심과 도심의 유래인 형기지사와 성명지정을 구별하고, 또 인욕과 천리를 확연히 구별하며 인욕에 대한 천리의 규제를 강조했다. 그렇지만 인심도심에 대해서는 그와 같이 구별하지 않았다. 주자는 인심과 도심을 심의 이발인 지각으로 해석하고, 인심을 도심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정암은 인심과 도심을 아예 성체와 정용으로 구별했다. 이것은 규제하는 것과 규제당하는 것을 구별하는 절욕의 윤리학의 근본적인 요청에 주자보다 더 충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